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2일 저녁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집법 저지를 위한 무제한 토론을 마친 뒤 자리에 돌아와 물을 마시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무제한 반대 토론이 끝나고 테러방지법이 통과됐다. ‘괴물 국정원’의 탄생이다. 박근혜라는 사람이 청와대에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시나리오였다.
결말이 예상된 싸움이었지만 양식 있는 이 땅의 국민들은 야당의 필리버스터에 환호하고 응원했다. 투표장에 꼭 나가야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필리버스터 퇴각’은 이들의 뒤통수를 치는 행위였다. 착실하게 원리금 갚던 채무자의 야반도주였다.
가뜩이나 선거 일정이 지연됐는데 “야당이 아예 선거를 못 치르게 하고 있다”는, ‘애국 앵커’의 열변과 조선일보의 시커먼 헤드라인이 겁나는 건 알겠다. 3월10일까지 무제한 토론으로 회기가 종료돼도 그 다음 임시국회에서 테러방지법은 통과될 수 있다. 결국 이 싸움을 어떻게 끝내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크리넥스에 손도 안 대고 코푸는 방식으로 제1야당의 당권을 먹은 김종인 대표가 의원들의 지지로 선출된 이종걸 원내대표를 “선거 지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라고 나무라며 중단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필리버스터는 국민들에게 테러방지법의 부당함과 박근혜 정권의 폭주를 알리는 효과가 컸다. 필리버스터 압박으로 대타협이 이뤄져 독소조항이 제거된 테러방지법을 만드는 실낱같은 희망도 있었겠지만 그건 대통령이 바뀌지 않는 한 불가능한 목표였을 터. 시간이 흐를수록 필리버스터의 목적은 테러방지법의 부당함을 알리는 것으로 뚜렷하게 수렴됐다. 그렇다면 무제한 반대 토론을 쭉 이어갔어야 했다. “선거법 발목 잡는다”는 비판이 두려웠다면 국회 본회의장에서 나와 국회 앞 시민 필리버스터단과 결합할 수도 있고 당사에서 해도 된다. 김기식, 이개호, 전해철, 홍영표, 유기홍, 우상호, 부좌현, 남인순, 김상희, 김태년, 박홍근, 김민기, 백군기, 박남춘, 이미경 의원. 필리버스터를 중단한다는 ‘당의 결정’으로 본회의 연단에 오르지 못한 의원이 15명이나 됐다. 공중파와 종편과 수구언론이 외면해도 누군가는 카메라를 들고 이들의 발언을, 끝나지 않은 필리버스터를 중계했을 거다.
그렇게 아름답게 출구를 찾을 수 있었지만 더불어민주당의 그 누구도 이런 아이디어를 내지 않았다. 아니 누군가 제안을 했어도 김종인은 “안보 이슈는 우리에게 불리하니 경제 이슈로 넘어가야 한다”며 묵살했을 거다. 테러방지법 논란을 국민의 인권과 기본권이 정보권력에 침해되는 문제가 아닌 ‘안보 이슈’로 보는 그 사람의 한계다. 그리고 거기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제1야당의 한계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관련영상] 4번 정의당, '야권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더 정치 #11] [관련영상] 불붙은 ‘사랑과 전쟁’ 총선 편 [말풍선 브리핑 201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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