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05.19 19:26 수정 : 2016.05.19 19:29

작가 황석영 특별기고

5·18민주화운동 36돌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끝내 제창되지 못했다. 1997년 국가 기념일 지정 이래 공식 추모곡처럼 불리다 이명박 정부 2년째인 2009년부터 합창만 허용한 까닭이다. 올해는 박근혜 대통령의 재검토 지시에도 불구하고 보훈처에서 끝내 제창을 불허하면서 어느 해보다 뜨거운 논란의 쟁점이 됐다. 1982년 백기완 선생의 장편시 ‘묏비나리’를 차용해 이 노래의 가사를 지은 황석영 작가가, 일부 우익세력의 ‘왜곡 시비’에 대한 의견을 직접 보내왔다.

어느새 서른여섯 해가 지난 ‘5·18 민주화운동’의 날을 보내면서, 우리는 예년과 다름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을 겪었다. 노래를 만들게 된 계기와 뒷이야기는 세간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다시 한 번 짚어 본다.

광주의 참사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우선 참사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먼저 항쟁의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었고 우리 나름의 매체를 동원하여 보다 많은 대중에게 전파하려고 고심했다. 당시에 언론 방송은 신군부의 검열과 보도지침에 묶여 있었고 저들이 내주는 왜곡된 보도자료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었다. 야학과 문화패의 책임자로 도청의 마지막 새벽에 죽은 윤상원과, 현장 취업을 했다가 과로로 숨진 박기순의 영혼결혼은 슬픔에 잠긴 유족들을 불러일으키고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 당국은 망월동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래극 <넋풀이>가 기획되었고 이것을 전국에 전파하기로 했다. 요즘 식으로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쯤 되는 셈이다. 가정용 카세트녹음기로 카세트테이프를 만들어 기독교 사회단체를 통하여 전국으로 해외로 전파했다. 그것이 1982년 봄의 일이다. 이후 광주의 유족·부상자·구속자·시민들은 이 노래를 나의 노래로 그리고 광주의 노래로 부르면서 슬픔과 통한을 달래 왔고 전국의 학생·시민·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누구의 사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올해도 기념식의 주관자인 보훈처장은 ‘국민 분열’을 야기한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것을 막았고 ‘이 노래가 김일성의 님을 상징한다’는 등의 항간에 떠도는 루머를 공직에 있는 사람이 그대로 이용하고 기정사실화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모욕했다. 우스갯소리인지 ‘님’과 ‘임’의 차이를 따지기도 하는데 당시의 맞춤법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보듯이 나중에 달라진 것이다.

근대화의 정신적 핵심 가치가 민주주의라면 우리네 개발독재는 그것을 억압하고 부정하면서 이루어낸 왜곡된 근대화였다. 이러한 왜곡을 뒤늦게라도 바로잡아 나가는 것이 선진 민주사회를 이루는 길이다. 국군은 어디까지나 국민의 군대이며 국민의 아들딸이다. 그러므로 군의 정치중립화는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이다. 군대가 어느 특정 정치세력이나 권력자의 사병이 되면 이들은 바로 국민의 적으로 돌변한다. 더구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가 특수부대를 동원하여 계엄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을 오천명 이상 살상했으니 그에 대한 광주시민의 저항은 마땅히 정당방위였다. 시민들의 항쟁은 처음부터 무차별 살상에 대한 인지상정으로서의 저항이었고 민주화에 대한 각성은 뒤에 왔다. 그러므로 현충원과 망월동은 같은 국립묘지이나 가치의 성격을 놓고 별개의 장소로 생각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체성을 놓고 양자는 똑같이 기억해야 할 소중한 장소가 된다. 그러한 이유로 광주시민의 저항은 폭동이 아니며 폭도들이 아니다.

우선 논란 중에 나의 방북 사실을 들어 ‘임을 위한 행진곡’과 광주를 음해하는 악질적인 왜곡에 대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저 노래극이 제작된 때는 1982년이고 내가 방북한 때가 1989년이다. 어떻게 당시에 광주에서 노래를 지으면서 김일성의 지령을 받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것은 광주항쟁을 북한 특수군이 와서 일으켰다는 황당한 허위사실과 맞아떨어진다. 참사의 책임자인 전두환씨도 그런 일이 없다고 밝혔다. 나의 27년 전의 방북 동기는 그동안 여러 지면에서 수차례 밝혔다. 역대 독재정권은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거세지거나 정치적 위기가 오면 북한을 빌미로 삼아 온갖 간첩 사건을 만들고 북풍과 종북몰이 등으로 탄압을 일삼았다. 놀랍게도 몇 년 전부터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듯한 많은 일들이 현재 진행 중이다.

당시의 민주화운동 단체는 노태우 정부의 남북교류선언이 선포되자 민간교류의 정면돌파를 작심하고 문익환 목사와 나의 방북을 결정했다. 목사와 소설가를 간첩으로 몰지는 못하리라는 기대를 했을 것이다. 이후 우리의 방북을 결정했던 집행부는 거의가 여야 정치인으로 진출했다.

보수 인사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내가 북한 영화 <임을 위한 교향시>의 각본을 써주고 공작금 25만달러를 받았다는 허위 사실을 공공연히 유포하며 나의 방북 전력을 정치적으로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 내가 독일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남북 당국은 물밑에서 경제·문화 교류에 대한 접촉을 수십차례 진행했다. 1990년 제1차 범민족대회 참가차 해외동포들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을 때 시사회에서 처음 영화를 보았고 스크린에 북한 시나리오 작가 이춘구와 나의 이름이 나오고 윤이상 작곡가의 음악이 주제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허락도 없이 왜 내 이름을 넣었냐고 항의했으나 내가 기록한 항쟁기록을 참조했으니 당연하다는 답을 들었다. 이를테면 남한의 각계각층에서 널리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임을 위한’을 가져오고 베를린 필하모니가 초연한 윤이상 작곡 ‘광주 교향시’를 합성하여 영화 제목 ‘임을 위한 교향시’를 정한 것이 틀림없다. 나는 이 사실을 베를린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뷰를 통하여 국내에 알렸다.

내가 베를린을 떠날 무렵 남북 사이에 영화 <장길산>의 합작에 대하여 모종의 논의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논의는 내가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 구체화되었고 남북 영화 관계자가 모인 자리에서 계약서를 쓰고 남북의 계약금 지급과 함께 완료되었다. 당시에 ‘장길산’ 남북 합작 기획은 현지에서 기자회견을 통하여 널리 알려졌던 일이다. 나중에 귀국해 이미 공개된 사실을 수사당국이 재확인했고 조서에는 공작금이라고 기재되었다. 공작금을 공개적으로 받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수사였다. 재판 과정에 당국의 허락을 받고 출국하여 계약했다는 남측 영화인의 증언이 있었으며, 계약서를 재판부에 제출했고 그 사본은 석방대책위원회가 출간한 나의 방북기행문 책자에 실려 있다. 어쨌든 나는 망명 5년과 수감 5년으로 10년 이상 글을 쓰지 못했고 내 인생에서 뼈아픈 대가를 치렀다. 일부 극우단체와 보수 인사가 인터넷에 퍼나르는 것들을 보면 당시 수사를 진행 중이던 안기부가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혐의 내용을 보수신문에 흘린 것들을 짜깁기한 내용이다. 유엔 인권위와 미 국무부까지 국가보안법의 개정 철폐를 권유한 지 수십년이 지났는데 이 땅에서는 아직도 분단을 악용하여 조작과 왜곡이 버젓이 성행하는 것은 분명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터이다.

황석영 작가·‘임을 위한 행진곡’ 공동 작사가
세계 어느 나라나 아픈 근대화 과정이 있었지만 우리도 옛날의 과오를 떨쳐버리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민주적인 선진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더 이상 ‘국론분열’을 조장하며 노래를 탓하지 말라. 역사가 망각과 왜곡에 대한 기억의 싸움이라면 5·18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황석영 작가·‘임을 위한 행진곡’ 공동 작사가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