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601연대 루보가 만든 쿳다웅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민주화 투쟁의 변함없는 징표다. 버마학생민주전선의 청년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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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69) 쿳다웅과 임을 위한 행진곡
“피로 진 빚 피로 갚는 멋진 아들, 싸우는 공작몸 바쳐 전진하는 욕망 버린, 싸우는 공작
차별 없고 계급 없이 맞잡은 손, 싸우는 공작
더러운 역사 깨부수고 일어선, 싸우는 공작
…”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601연대 루보가 만든 쿳다웅(싸우는 공작)을 부르며 학생군은 반독재·민주화 투쟁에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1988년 ‘랭군의 봄’을 학살 진압한 군사정권에 쫓겨 국경 산악 밀림으로 빠져나온 청년·학생들이 그 주인공이다. 26~27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601연대 학생군이 피투성이 동지를 전선에 묻으면서 눈물로 부르던 노래 쿳다웅을 잊을 수 없다. 노래는 겁에 질린 사람을 일으켜 세웠고, 노래는 산악 밀림 어둠을 깨웠다. 노래는 정신이었고 노래는 희망이었다. 노래는 사랑이었고 노래는 투쟁이었다. 노래는 마시는 물이 됐고, 노래는 먹는 밥이 됐다. 노래는 모든 것이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외로운 국경 산악 전선에서는. 모든 조직 깃발과 상징물에 등장 1930년대 학생운동 때부터 대물림해온 버마학생동맹 상징인 쿳다웅은 곧 버마 현대사였다.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이 이끌었던 반식민지 투쟁에서도, 1960년대부터 오늘까지 이어지는 민주화 투쟁에서도 쿳다웅은 변함없는 징표였다. 모든 조직의 깃발과 상징물에 쿳다웅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동안 버마학생동맹의 노래 쿳다웅도 여러 조직들 사이에서 가지가지 음과 노랫말로 거듭났다. 예컨대 버마학생민주전선 안에서도 서너 가지 쿳다웅이 불렸고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도 자신들이 만든 쿳다웅을 불러왔듯이. 노래는 그렇게 소중했다. 나는 수많은 민족해방·민주혁명 전선을 취재하는 동안 저마다 노래에서 투쟁 동력을 얻는 걸 보았다. 노래는 혼이었고 노래는 무기였다. 그래서 침략자나 독재자들은 하나같이 노래를 못 부르게 했던 모양이다. 침략자 일본 제국주의가 그랬듯이, 독재자 박정희가 그랬듯이. 올해도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마음껏 부를 수 없었다는 아주 구접스런 뉴스를 보면서 속이 뒤틀렸다. 몇 해 전까지 나는 아시아 기자들과 함께 예닐곱 차례 5·18 기념식을 취재했던 적이 있다. “왜 시민이 부르고 싶어하는 노래를 정부가 못 부르게 하는가?” “정부가 기념일로 정해놓고 노래는 왜 인정하지 않나?” “아시아 민주화 챔피언이라는 한국이 그 노래 때문에 무너지기라도 하나?” “한류가 판치는 마당에 정부가 노래를 간섭한다고?” 이명박 정부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푸대접하기 시작했던 2009년부터 광주에 갔던 아시아 기자들은 늘 이런 물음을 달아 기사를 날렸다. 온 세상에 남우세당했다는 뜻이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박근혜 정부까지 노래 하나로 8년 동안 기념식이 꼬였다. 5월16일 보훈처가 내놓은 보도자료와 언론 브리핑을 보니 박근혜 정부 깜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보훈처 발표 몇 가지를 짚어볼 만하다. “애국가도 국가 기념곡으로 지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곡으로 지정할 경우 국가 기념곡 제1호라는 상징성 때문에 또다른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이 무슨 난데없는 변명질인가? 애국가를 국가 기념곡으로 지정하겠다는 말인가? 애국가란 건 말 그대로 국가다. 국가란 건 무슨 기념곡 따위가 아니다. 국가는 나라를 상징하는 노래다. 정부 기념식뿐 아니라 공적 행사에서 모든 노래에 우선한다. 마땅히 5·18 기념식에서도 불러왔다. 비가 오든 지루하든 아무도 꼬투리 안 잡고 4절까지 따라 불렀다. 애국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견줘 논란을 따질 일이 아니다. 본질을 비틀면 안 된다. 이건 애초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애국가를 마다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정부가 애국가를 들이대는 속셈이 5·18에서만큼은 아주 고약하다. 1980년 전두환 일당이 국가 공권력을 몰고 나와 애국가를 부르던 광주 시민을 학살했다. 국가가 지켜주지 못한 시민들한테, 국가한테 살해당한 시민들한테 이제 와서 애국가를 핑곗거리로 내세운다는 건 참 염치없는 짓이다. 5·18 기념식에 가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 보면 안다. 그 노래가 가슴에서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내 경험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애국가는 그저 입으로 웅얼거리는 소리였을 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국가 공권력이 애국가를 살해한 광주였던 까닭이다. 버마학생동맹의 상징 쿳다웅
피투성이 전선에서 눈물로 부르던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혼이자 희망
갖가지 음과 노랫말로 거듭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
애국가 들먹이며 궁색한 변명만
공권력이 애국가를 살해한 광주
민주주의 짓밟힌 우리 시대의 불행 아직 민주주의를 말할 수 없는 까닭 “노래 제창은 정부 기념식에서 4·19 기념식은 4·19의 노래 등 기념일과 동일한 제목의 노래를…, 기념일 제목과 다른 제목의 노래는 합창단이 합창하여…, 정부 관례로 (임을 위한 행진곡의 경우) 이에 맞지 않는다.” 여기선 제목 탓이란다. 참 버젓하지 못하다. 시민사회는 그동안 노래의 정신을 말해왔다. 관례란 건 바꾸면 새로운 관례로 태어난다. 그렇게 시대와 상황에 맞춰 바꿔온 게 관례다. 케케묵은 게으름을 관례라 부르지 않는다. 기껏 제목 따위로 우기는 건 시민을 아주 업신여기는 짓이다. “지난 8~9년 동안의 논란을 2~3일 만에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10년 넘게 제창해온 노래를 이명박 정부 때 합창으로 바꾸는 데는 1년도 안 걸렸다. 8~9년 동안 논란이 있었다면 그사이 뭘 했는가? 누가 2~3일 만에 결정하라고 했던가? 보훈처가 놀고먹거나 권력에 치였거나 뭐가 됐든 시민 세금으로 월급 받는 이들이 할 말은 아니다. “북한이 1991년 5·18을 소재로 제작한 영화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북한 특수부대 600명이 광주사태에 개입했다고 떠들어대던 소리 같기도 하고. 걱정이 지나치다. 그 영화가 나오고 25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은 안 망했다. 보훈처 말고는 그런 영화를 아는 이들조차 흔치 않다. 홍콩, 대만, 중국,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타이, 필리핀, 말레이시아, 버마에서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떻게 이해할까?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참 쪼들리는 대한민국 정부다. 문화를 모르면 공부를 하든지, 공부가 싫다면 세상 돌아가는 눈치라도 보든지.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께서 참석하는 정부기념식이 국민통합을 위해 한마음으로 진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의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나뉘고 있는 상황….” “별다른 지침이 있었던 건 아니다. 대통령께서 지난 13일 여야 3당과 회동을 하시고 말씀을 하셨고 그에 따라 논의를 거쳐 결론을 도출하게 된 것.” 1997년 5·18을 정부 기념일로 정한 뒤 10년 넘게 아무 탈 없이 불리던 노래가 2009년 이명박 때 난데없이 푸대접받기 시작해서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통령에 따라 정부 기념식이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이건 헌법 전문에 정신을 계승하라고 못박아둔 3·1운동이니 4·19혁명뿐 아니라 정부가 기념일로 정한 3·15 의거나 5·18 민주화운동 같은 가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거나 정신이 몽롱한 자가 대통령을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대통령이란 건 시민을 대표해서 정부를 끌어가는 사람이다. 근데 정부가 가치를 본받으라고 가르치는 기념식에서 시민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지도 못하는 대통령은 대체 뭔가? 이건 길바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 놓아 불러본 적도 없고, 그리하여 민주주의 가치를 몸소 느껴본 적도 없는 자들을 대통령이라 부르는 우리 시대의 불행이다. 아직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를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올해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가슴에 묻은 많은 이들을 생각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천천히 부르며 글을 마친다. 2017년이 있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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