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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24 20:21 수정 : 2016.05.24 20:21

빛깔 있는 이야기

그 옛날 무수히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듣는다. 생각지 못했던 ‘산천’ 생각이 났다. 대하소설 <토지>의 한 대목. 이동진은 독립운동에 투신하려 연해주 망명을 결심한다. 진주에서 하동으로 동문수학 최치수를 만나러 갔다. 신경증을 앓는 최 참판댁 당주는 유교적 허무주의자다. 대의명분을 조롱하며 세상사 출입을 작파해버린 지 오래다. 친구의 결의를 듣자 그가 묻는다. “그래 자네는 무엇을 위해 자신을 바치려는가? 군왕을 위해서인가, 백성을 위해서인가?” 군왕이라 해도 백성이라 해도 그는 비웃었을 것이다. 이동진은 이렇게 답했다. “군왕을 위함도 아니고 백성을 위함도 아니고, 굳이 말하라 한다면 이 산천을 위해서라고나 할까.”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그럴 때 ‘산천’은 눈에 보이는 산과 시내는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 강산도 변한다. 변할 수 없는 것은 진실과 양심. 그것을 품고 보증하는 것이 산천이라 명명된 대지이고 하늘일 것이다. 마치 신앙고백과 같다. 그는 누구라 역성을 들거나 타매하는 법 없이 진실과 양심을 있는 그대로 품부한다. 하늘이 언제 내 기원에 속 시원히 응답해주던가. 그러나 믿음은 사소한 배반을 개의치 않는다. 그런 건 믿음의 시련이거나 악마의 시험일 뿐, 나는 믿는다. 오늘 내 진실과 양심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날이 온대도 당신만은 알 것이다. 나는 당신이 안다는 것을 믿는다. 두 눈 부릅떠 그를 향해 외친다.

사람을 줄여 삶이라 한다 들었다. 이동진의 ‘산천’은 그의 선조가 누대에 걸쳐 살아온, 그가 나고 자라온, 후손이 세세에 살아갈 산천이다. 그러나 그 산천인들 몰락한 양반 처지의 부유한 최치수의 비웃음을 면하긴 구차했을 것이다. 역시 산천이라 대신한 내면의 영원성이리라. 산천을 품고 떠난 이동진은 연해주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어떤 형태로든 신앙을 빙자한 신선 같은 고상함, 묘약 같은 주술, 백치 같은 착함을 경계해야 한다. 거기 세속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믿음을 위해 산대도 인간존재의 막다른 고독은 심각하고도 진지하다. 산천이든 강산이든, 진실이든 양심이든, 신앙이든 진리든, 그를 무엇이라 부르든 거기엔 영속한 사랑이 있다. 그뿐 아니고 나뿐 아니다. 사랑이 있으면 사사로이 변개 못할 ‘앎(기록)’도 있다. 비록 흘러간 세월, 사랑 없는 삶들이 사람들을 속일지라도.

천정근 목사(안양 자유인교회)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젊은 피를 들끓게 했던 외침이 이젠 나를 부끄럽게 한다. 또 그런 부끄러움으로 이 노래가 함부로 불리는 것조차 부끄럽다. 불리는 것도 부끄러운데, 산천도 진실도 양심도 갖지 못한 이들에게 모욕당함은 가당치 않다. 그러나 모욕과 훼방에 더럽혀질 산천이 아닌 걸 생각하니 그다지 분노가 일지는 않는다. 그 산천을 함께 갖지 못한 그들이 불쌍한 경지까진 아닐지라도, 내가 품은 산천을 갖지 못한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경멸할 수는 있다. 앞서서 나가진 못할지라도 지금도 따르고 있음을. 함께 깨어 응시하는 이 산천의 동지들과 함께.

천정근 목사(안양 자유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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