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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파리강화회의’라는 헛된 꿈…파리 곳곳에 남은 독립운동의 흔적들

등록 2019-04-29 07:52수정 2019-04-29 07:57

1919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프랑스를 찾은 김규식은 도착하자마자 파리 샤토가 38번지에 강화회의 한국대표관을 꾸렸다. 그 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이곳은 임정 파리위원부로 승격됐다. 19일 찾은 샤토가의 파리위원부 건물.
1919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프랑스를 찾은 김규식은 도착하자마자 파리 샤토가 38번지에 강화회의 한국대표관을 꾸렸다. 그 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이곳은 임정 파리위원부로 승격됐다. 19일 찾은 샤토가의 파리위원부 건물.
“조선의 독립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파리의 강화회의는 물론 세계의 동정이 모이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조선도 독립할 것이 틀림없다.” “만국회의(강화회의)에서 승인한 우리의 독립선언을 너희가 어찌 막을 수 있느냐.”

기미년(1919년) 3월 프랑스 ‘파리’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국제 정세를 아는 독립운동 지도층은 1차대전 뒤 패전국들의 식민지 처리를 논의하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처지를 호소하고자 했고, 기층민들은 이미 강화회의에 파견된 ‘우리 대표’(김규식)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만세시위에 호응했다. 연해주와 미주 등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일제히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지만, 상하이 신한혁명당이 파견한 우사 김규식만이 때를 맞춰 프랑스에 도착했다.

그는 파리에 도착한 뒤 파리 9구 샤토가 38번지에 대한민국 통신국(향후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을 개설하고 선전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 신문에 한국에 관한 기사 400여건이 게재된 건 그의 활약 덕이다. 지난 19일 우사가 정신없이 뛰어다녔을 샤토가에 도착하니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청사’라고 새겨진 은빛 한글 현판이 반겨주었다. 지금은 슈퍼마켓 등이 들어서 있는 주택가의 흔한 7층 석조건물이다.

파리위원부의 희망은 곧 절망으로 퇴색됐다. 프랑스 당국은 ‘정부가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며 한국 대표단을 문전박대했다. 강화회의에서 공식 발언 기회조차 얻지 못한 우사는 크게 실망했다. 그해 6월28일 베르사유조약 체결과 함께 파리강화회의가 소득 없이 마무리되자 미국으로 향하게 된 김규식은 외신기자들과의 환송연에서 격정적인 연설을 토해냈다. 이를 지켜본 프랑스 일간지 <라 랑테른>은 1919년 8월8일치에서 “일본의 속박 아래 꼼짝 못 하고 떨고 있는 2천만 영혼의 간청에도 성의 있게 답하지 않는, 정의와 사상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프랑스에 그(김규식)는 경악했다”고 보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불 특파위원으로 활동한 서영해가 거주하며 대유럽 외교활동을 위한 고려통신사로 이용했던 파리 말브랑슈가 7번지. 17세기부터 호텔로 이용됐으며 여전히 호텔로 남아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불 특파위원으로 활동한 서영해가 거주하며 대유럽 외교활동을 위한 고려통신사로 이용했던 파리 말브랑슈가 7번지. 17세기부터 호텔로 이용됐으며 여전히 호텔로 남아 있다.
강화회의의 실망스러운 결과에도 그 뒤 프랑스에는 숱한 조선인이 모여들었다. 우사가 떠난 자리를 대신해 파리위원부를 사실상 홀로 꾸려간 황기환 서기장은 1920년 파리에서 프랑스어와 영어로 된 잡지 <자유한국>을 1천부 발행해 유럽의 언론사와 저명인사들에게 보냈다. “우리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 발간 목적이었다. 황기환은 1919년 10월 1차 세계대전 뒤 러시아 무르만스크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오갈 데가 없어진 한인 노동자 500명의 소식을 듣고, 직접 프랑스 노동부와 교섭에 나서 노동자 35명을 프랑스에 데려오기도 했다. 이들 노동자는 프랑스 마른주의 쉬프라는 작은 도시의 전지 수선공사에 고용됐는데, ‘재법(프랑스)한국민회’를 결성해 임금 일부를 파리위원부에 기부하는 등 독립운동을 후방지원했다.

황기환이 1921년 미국 워싱턴으로 떠난 뒤 서영해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1920년 유학생 20명과 중국 상하이에서 파리로 온 서영해는 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재정난으로 문을 닫자 1929년 ‘고려통신사’를 설립했다. 그는 고려통신사의 첫 임무로 한국의 역사와 독립운동을 다룬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을 출판했다. 형식은 소설이지만 그가 보고 들은 일제강점기의 비극을 옮긴 것이었다. 이 책은 1년 만에 5판을 찍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서영해는 화자를 빌려 절규했다. “일본의 범죄행위들을 벌해야 하는 것은 바로 문명사회 전체다. 억압하는 일본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바로 인류 전체다.”

글·사진 파리/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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