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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23 13:57 수정 : 2019.03.26 22:23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버닝썬 사태와 언론

‘5조 케이팝 흔들’ ‘YG 주가 하락’
‘전체 연예산업 매도 없어야’…
버닝썬 사태 터지자 나오는 기사들

피해자 규모, 정확한 실상
아직 제대로 파악도 못했는데
‘케이팝 위축’ ‘일부 문제’ 타령

언론 할 일은 더 많은 검증과 비판
연예계 남성연대·여성혐오 끊어야

‘버닝썬 게이트’와 관련해 지난 14일 경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방경찰청으로 출석하고 있는 빅뱅 멤버 승리.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최근 발표한 해외한류 실태조사에 따르면 아시아와 미주, 유럽, 중동, 아프리카 등 각지에서 한국을 연상하는 이미지로 가장 먼저 케이팝을 꼽았다. (중략) 이 때문에 국내 연예계에서 불거진 이번 논란이 한류를 통한 마케팅과 각종 부대사업에도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2019년 3월14일, <아시아경제>, ‘5조 ‘케이팝 산업’이 흔들린다…한류 타격은 없나’, 최대열 김흥순 기자)

온 나라가 ‘버닝썬 게이트’와 단톡방 안에서 오간 추악한 대화에 경악하는 동안에도, 한켠에는 케이팝(K-POP) 산업의 미래를 걱정하는 기자들이 있다. 경제지답게 제목부터 산업 전체의 규모를 뽑아 제시한 <아시아경제>의 기사는 무려 ‘5조6000억원’ 규모나 되는 거대 산업으로 성장한 케이팝 산업이 ‘논란’ 때문에 흔들릴 수 있다는 염려를 전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정준영이 이미 성관계를 불법 촬영한 영상을 단톡방에 유포한 혐의에 대해 “제 모든 죄를 인정한다”고 말했음에도 굳이 ‘혐의’나 ‘논란’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쯤에서 그만하자고?

<아시아경제>가 ‘5조’라는 액수를 논하며 우려를 표명한 다음 날, <중앙일보>는 기사를 통해 훨씬 더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했다. “케이팝의 위상도 흔들리고 있다. 2000년 에이치오티(H.O.T.)가 중국 베이징에서 첫 단독 공연을 하며 등장한 ‘한류’가 올해 방탄소년단이 9만석 규모의 영국 웸블리에서 공연하기까지 세계적 규모로 성장하는 데 20여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근 한달 사이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다. (중략) 빅뱅 승리의 소속사였던 와이지(YG)엔터테인먼트 주가는 15일 기준 3만5000원 선까지 떨어졌다. 승리가 은퇴를 발표한 11일 하루 만에 시가총액 1109억원이 줄어든 이후에도 계속 하락해 현재 6520억원 수준이다. 2018년 연결기준 매출액은 2858억원으로 2017년 3498억원 대비 18.3% 하락한 데 이어 올해 추가 하락 가능성도 있다.”(2019년 3월15일, <중앙일보>, ‘성범죄 스캔들 이은 거짓말 후폭풍…공든 케이팝이 무너진다’, 민경원 기자)

온통 숫자로 도배된 <중앙일보>의 기사는, 한류가 베이징에서 웸블리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는지를 되새기고, 그 성과가 얼마나 거대했는지 구체적으로 헤아린 다음, 그게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절절하게 묘사한다. 시가총액이 하루 만에 1109억원이 줄어들고, 18.3%가 하락하고, 추가 하락 가능성도 있고….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어떤 기자들은 ‘버닝썬 게이트’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을 걱정한다. <텐아시아>의 3월18일 기사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시작된다. “또 다른 대중문화단체 관계자는 “연예계 전체에 상식을 벗어난 다른 이면이 있는 것처럼 보는 시선이 걱정스럽다”며 “일부의 범죄와 일탈행위로 연예산업 전체가 매도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우려했다.”(2019년 3월18일, <텐아시아>, ‘승리·정준영 카톡방 ‘쓰나미’…쑥대밭 된 연예계, 어쩌나’, 노규민 기자)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클럽에 놀러가곤 했던 여성들은 자신들도 언제든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란 사실에 분노한다. 승리와 정준영과 최종훈과 이종현과 용준형의 팬이었던 여성들은 자신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성매매 비용으로, 데이트 강간 약물 ‘물뽕’ 구매 비용으로 쓰였을 것이란 생각에 분노한다. 사건을 유심히 지켜본 이들은 업계 내에서는 이미 2년쯤 전부터 문제의 단톡방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는 <에스비에스 퍼니>(SBS funE) 강경윤 기자의 말에 분노한다. 이렇게 분노할 일들이 많은데, 대체 어느 단체 관계자인지도 모를 익명의 정보원은 “일부의 범죄와 일탈행위로 연예산업 전체가 매도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말로 ‘진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쯤 되니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종합해보자. 연예계는 단톡방에 대한 소문이 2년씩이나 도는 동안에도 자정하지 못했는데, 오히려 승리가 ‘젊은 나이에 화려한 부를 쌓아 올린 성공한 사업가’라는 이미지로 방송에서 승승장구하도록 내버려뒀는데, 당장 이 일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진 남자 연예인이 한두 명도 아니고 4개 소속사에 걸쳐 다섯 명이나 되는데, 그 모든 게 막 밝혀지기 시작한 시점에서 벌써부터 ‘5조’나 되는 케이팝 산업이 ‘흔들리’고 ‘무너’져서 ‘쑥대밭’이 되게 생겼다는 기사가 나온다. ‘일부’ 나쁜 연예인이 있었을 뿐 ‘연예산업 전체가 매도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필사적인 변명이 나온다. 과연 누가 선선히 동의할 수 있을까?

성관계 동영상 불법 촬영·유포 논란을 빚은 가수 정준영이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로 출석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정말 일부의 문제인가

물론 나는 기사를 쓴 기자들이 다른 뜻은 없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연루된 연예인들이 성범죄와 마약, 폭력, 권력과의 유착 등으로 업계 전체에 초래한 피해가 얼마인지 서술함으로써, 이들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강조하려는 선의였을 것이라 믿고 싶다. 업계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루아침에 망할 수 있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자정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장 직간접적인 피해자가 얼마나 되고 그 피해를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도 시작하지 못한 마당에, 산업이 위축된다는 기사가 먼저 나오는 건 순서가 한참 잘못됐다. 이게 일부의 문제인지 연예계 전반의 구조적인 문제인지 파악도 못 했는데 덮어놓고 일부의 문제일 뿐이라는 항변까지 같이 나오면, 본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와는 무관하게 이렇게 읽히지 않겠나? “일부의 문제니까 이쯤에서 그만 캐시라. 이러다 우리 다 죽는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정말로 ‘일부’의 문제라서, 이번에 문제가 된 사람들만 잘 솎아내면 연예계도 괜찮은 곳이라고 믿고 싶다. 그런데 남자 연예인과 동업을 해본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승리의 카톡 내용이 죄가 된다면 대한민국 남성들은 다 죄인 아닌가.” <주간경향>과 전화 인터뷰를 나눈 클럽 버닝썬 대표 이문호의 말이다. “성매매가 이뤄진 것도 아니고 장난친 것”이라는 전제를 깔았지만, 이문호의 세계관 속 ‘대한민국 남성들’은 전부 단톡방에 모여 앉아 불법 촬영한 성관계 동영상을 공유하고, 중요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성을 동원하자는 말을 주고받으며, 다 같이 여성들을 강간하자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나누는 존재다. ‘승리 절친’으로 사업을 같이 하며 연예인들과의 친분을 쌓았던 이의 말이다.

언론사 기자부터 나 같은 칼럼니스트까지, 이쪽 분야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다 조금씩은 오늘날의 ‘버닝썬 게이트’에 대한 책임이 있을 것이다. 남자 연예인들이 방송을 통해 보여준 이미지를 기사와 칼럼을 통해 거푸 증폭시켜, 검증되지 않은 판타지의 장벽을 굳건히 해준 책임 말이다. 그 책임 때문에라도, 언론은 한국 연예계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지적하고 더 많은 검증과 개선을 요구할 의무가 있다. 케이팝 산업이 얼마나 위축이 되었고 재건을 위해서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 헤아리는 건, 그 모든 작업이 일단락되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누군가는 “설마하니 연예계 전반에 이런 일이 만연하겠나”라고 반문하겠지만, 승리와 정준영과 최종훈과 이종현과 용준형이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도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모르지 않았나?

이 길의 끝에 ‘문제를 일으킨 몇명을 처벌한 뒤 다시 한국 연예계를 예전처럼 소비할 수 있는 우리’ 같은 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연예계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과한 게 아니며, 그 의심을 극복하고 자정을 증명해야 할 의무는 업계에 있다. 지금 옆에서 “이러다가 케이팝이고 한류고 다 망하게 생겼다”고 걱정하는 일이야말로, 한국 연예계가 다시 오래된 남성연대와 여성혐오의 길로 굴러떨어지는 걸 방조하는 일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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