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9.09 17:02
수정 : 2019.09.09 18:55
남북관계나 한-일 분쟁이나 어떠한 외교안보 이슈와 문제가 발생해도 더 기승을 부리는 언제나 똑같은 레퍼토리의 ‘기-승-전-한미동맹’ 주장 앞에 미래를 향한 한국의 외교안보 입지에 대한 질문은 무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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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25일 오전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우리 군의 독도 방어 훈련 실시에 관한 방송 뉴스를 보고 있다. 앞서 정부는 22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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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중국을 방문한 일본 의회 대표단한테 마오쩌둥은 “매일 사죄를 강요받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며, 일본에 과거사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기본 방침을 밝혔다. 마오는 “한번에 한 국가만 틀어쥐는” 전술을 제시하며, 특유의 게릴라전 이론을 외교에 적용하는 문건을 발표하기도 했다.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로 대표되는 일본의 전후 보수 본류들도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아시아에서 지위와 영향력 회복을 꿈꿨다. 1948년부터 54년까지 총리로 장기 재임한 요시다는 “빨간색이나, 초록색이나” 상관없이 중국과 유대를 쌓겠다고 선언했다.(리처드 맥그레거의 <미국,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꿈꾸는가>에서)
미국은 A급 전범이자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기시 노부스케의 집권을 도우며, 중-일 접근을 차단했다. 기시가 주도한 미-일 안보조약 개정으로 일본은 미국의 반소·반중 군사기지의 역할을 강화하고, 중-일 접근은 물 건너갔다. 70년대 초 전격적인 미-중 화해가 전개되자, 재빨리 일본은 1972년에 중국과 수교했다. 미국은 1979년이 되어서야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했는데, 일본은 그 1년 전에 중국과 평화우호조약을 맺기도 했다. 중국은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고, 일본도 사죄하지 않았다. 양국의 최대 사안인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 영유권 문제에서도 덩샤오핑은 “우리의 미래 세대가 결정하도록 하자”며 일본에 양보해줬다.
이때까지 동아시아 역사 문제는 오히려 미·중·일 서로가 상대에게 대범함과 우호를 보여주는 재료였다. 하지만 각국의 국내 정치와 아시아 패권 추구가 결부되며, 역사 문제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일본에서 강경한 재무장파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80년대 전반 집권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중국에서는 개혁·개방에 따른 대중의 불만을 반일 민족주의로 돌리려 했다. 미국은 천안문 사태로 인한 중국에 대한 회의, 그리고 사회주의권 붕괴에도 급속히 부상한 중국 견제를 위해 다시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
한-일 관계를 최악으로 만든 역사 문제는 미국·중국·일본이 전후 아시아 패권을 놓고 다투는 과정에서 휘두른 소재이다. 필요에 따라 덮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격화시켜 왔다.
미·중·일의 합종연횡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베의 일본이 미국에 올인하는 건 아니다. 일본의 아베 정권은 전후 기시의 보수 방류가 요시다의 보수 본류를 흡수한 정권이다. 즉, 미-일 동맹을 기축으로 하면서도, 아시아에서 미국으로부터의 영향력 독립과 위상 강화를 동시에 노린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기시이고, 내각의 실력자이자 전임 총리 아소 다로가 요시다의 외손자이다.
지난해부터 아베의 일본은 ‘일-중 관계 신시대’ ‘영원한 이웃나라’로 중국과 관계 회복을 시도하며 두 나라 사이의 역사 문제를 다시 묻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인도·태평양 전략을 선창해 아시아에서 일본의 방위 역할을 확대하며 미국과의 안보관계를 수직관계에서 수평관계로 바꾸려 하고 있다. 시진핑의 중국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호응하는 것도 무역 압박을 가하는 트럼프의 미국에 맞서려는 보험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에 맞서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지소미아)을 종료한 한국으로서는 삼면초가일 수도 있고, 세 나라를 상대로 철저한 현실주의를 구사할 기회이기도 하다. 일본이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로 한-일 관계를 파국으로 이끈 것은 중국과의 관계 때문이다. 한국 선에서 방어막을 치지 않으면, 언제라도 중국과의 더 큰 역사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미국의 국무·국방부 내의 친일 실무관료들을 동원해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철회를 압박하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지소미아가 미국을 통하지 않는 최초의 군사협력 관계이기 때문이다.
아베의 일본이 트럼프의 미국과 밀월관계도 아니다. 거세지는 무역 압박과 미-일 동맹에 대한 폄훼를 서슴지 않는 트럼프 때문에 미국의 옥수수를 구매하는 등 일본이 그동안 애지중지하던 농산물 시장도 개방을 눈앞에 두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확실히 해둘 것이 있다. 일본이 이제 원하는 것은 한-미 동맹 강화인가, 아니면 미국을 통하거나 안 통하거나 한국과의 군사협력 강화 등 영향력 확장인가? 그렇다면, 지소미아 종료를 놓고 한·미의 틈을 벌리려는 것이 누구인지이다.
하지만 남북관계나 한-일 분쟁이나 어떠한 외교안보 이슈와 문제가 발생해도 더 기승을 부리는 언제나 똑같은 레퍼토리의 기-승-전-한미동맹 강화 주장 앞에 이런 질문은 무력해진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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