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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17 05:00 수정 : 2020.01.17 09:24

‘반일종족주의’ 비판한 첫 책…총독부 간부 “트럭 몰고 순사 동반해 시골서 잡아왔다”
“불편함 넘어 고역스러운 책이지만” 진실을 갉아먹으려는 ‘역사 부정’ 기도 넘어서야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광고판에 실었다가 조선인 탄광 노동자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자 사과한 사진이다. <산케이신문>은 이 사진이 “하시마(군함도)가 아닌 후쿠오카현 지쿠호 탄광에서 일본인 광부를 촬영한 사진”이라고 보도했다. 근로정신대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반대를 론(論)하다: ‘반일종족주의’의 역사부정을 넘어
정혜경·허광무·조건·이상호 지음/선인·1만5000원

“암성재상(岩城在祥, 1922년생, 경남 양산군 출신). 1943년 9월20일 홋카이도탄광주식회사 헤이와(平和)탄광 소속 마야치 지갱(地坑)에 동원. 1944년 5월17일 오전 2시경 도주하던 중 적발되어 목재로 앞이마를 얻어맞아 유바리 탄광의 광산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오후 9시30분 사망. 함께 도주한 금본선덕(金本仙德, 김선덕)은 붙잡히고 암성혜호(岩城惠鎬, 이혜호)는 격투를 벌이는 사이에 도망. 회사 측은 암성재상의 죽음에 대해 ‘절대로 비밀에 부치고 공표하지 말 것’으로 하고, 붙잡은 김선덕이 진상을 폭로할 우려가 있으므로 경찰서에 유치한 뒤 기회를 보아 북방으로 연행하기로 함.”

홋카이도탄광주식회사 내부 자료 <쟁의관계>에 실린 ‘이입반도에 대한 상해치사사건 발생에 관한 사건’(1944년 5월24일 작성)의 일부다. 암성재상의 한국 이름은 이재상이다. 이재상 등 3명이 탈출했는데, 1명은 맞아 죽고, 1명은 붙잡았으며, 1명은 끝내 도망갔다는 내용이다. 회사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동료를 북방으로 보내려고 한다. 자유로운 계약 관계였다면 퇴사하면 될 일인데, 이들은 도주를 택했다. 강제동원이었기 때문이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등이 펴낸 <반대를 론하다: ‘반일종족주의’의 역사부정을 넘어>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역사왜곡 도서 <반일종족주의>를 반박하며 증거로 제시한 수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다. <반일종족주의>는 5~7장에서 ‘징용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약 8개월 동안 단기간에 실시했고, 1939년 9월부터 실시한 모집과 관 알선에는 법률적 강제성이 없었다. 조선인 노무동원은 기본적으로 자발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강제동원을 동원 경로에 따라 세분하면서 마치 징용을 강제동원으로 인정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들은 강제징용과 강제연행도 부인한다. 당시에는 강제징용이라는 말 자체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반대를 론하다>는 반박의 근거를 주로 일본 당국이나 기업 자료에서 찾는다. 일본 내무성 관리국이 조선에 출장 보낸 직원은 1944년 7월 출장복명서를 통해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그 밖의 어떤 방식을 통하더라도 출동은 오로지 납치와 같은 상태이다. 그 이유는 만일 사전에 동원 사실을 알리면 모두 도망쳐 버리기 때문이며, 그래서 야습, 유인, 기타 각종 방책을 강구하여 인질처럼 약탈, 납치하는 사례가 많아진다”고 보고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재무국장을 지낸 미즈타 나오마사는 “트럭을 몰고 순사를 동반해 시골에서 잡아채오는 일”이 있었다고, 1954년 3월6일 대장성 관방조사과에 설치된 금융재정사정연구소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반일종족주의>는 이 사진을 책에 싣고 “서경덕 교수가 뉴욕타임스퀘어에서 전광판으로 영화 <군함도>를 광고하는 데 이용한 것, (…) 엎드려 탄 캐는 조선인의 모습이라며 그가 광고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서 교수가 광고판에 실었던 사진과는 다른 사진이다. <반일종족주의>에는 이런 오류가 숱하게 많다. 근로정신대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암성재상의 경우처럼 퇴사가 아닌 도주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여주는 자료도 있다. 일본 미쓰비시광업㈜이 운영했던 니가타현 사도광업소의 ‘조선인 광부 현황(1943년 6월 기준)’을 보면, ‘사망’이나 ‘도주’는 있지만 ‘퇴사’라는 항목은 없다. 강제성이 없고 자발적이었다면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둘 수 있어야 하는데 당시 일본 탄광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원래 계약 기간인 2년이 지나도 현지에 남아 재계약을 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강제성이 없었고 기본적으로 자발적이었다는 <반일종족주의>의 주장은 이렇게 무너진다.

<반일종족주의>가 끼친 가장 큰 해악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며 거짓을 늘어놓는다는 데 있지만, 세부적인 왜곡을 통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야금야금 진실을 갉아먹으려는 시도라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 책은 논의 대상을 “1939년 9월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 약 6년간 전쟁 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을 했던 73만여명의 조선인 근로자”로 특정하는데, 이는 일본의 전쟁 범죄 범위를 좁히려는 의도라고 정혜경 위원은 갈파한다. “일본 전시체제기에 동원한 대상은 일본과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와 태평양지역의 사람·물자·자금”인데,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근로자’만 보겠다는 건 일제의 가장 큰 피해자인 중국과 그 밖의 피해 지역을 논의에서 제외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강제연행을 부인함으로써 강제연행만이 강제동원인 것처럼 논의를 몰고가려는 의도에도 속지 말아야 한다. 징용과 모집, 관 알선 모두 명백한 강제동원이었다. “조선인을 고용하고자 하는 고용주(일본 기업)가 신청한 인원수를 일본 정부가 조정해 배당하고, 조선총독부와 조정하여 확정”한 일본 제국주의 국가총동원체제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정부조차 1940년대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했다. “1940년대 일부 지역에서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가혹한 조건 아래에서 일하도록 강요당한 많은 한국인과 다른 사람들이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 정부 또한 요구 정책을 시행했습니다.”(사토 구니 주 유네스코 일본대사가 2015년 7월5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회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 공식 발언)

이렇게 명백한 사실을 외면하고 무지와 억측, 궤변으로 일관하는 책을 읽고 비판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반일종족주의>가 일시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화제가 되었지만, 학계의 진지한 반박이 많지 않았던 이유다. <반대를 론하다>는 <반일종족주의>를 비판하는 책으로는 처음 나온 것이다. 정혜경 위원은 <반일종족주의>에 대해 “역사학 연구자, 그리고 전쟁피해와 인권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 이 책은 불편함을 넘어 고역스러운 책”이라며 “그렇다고 전직 법무부 장관처럼 ‘읽어보지 않았으나 역겹다’는 말로 외면할 수는 없다. 연구자라면, 그런 무책임한 말 대신 <반일종족주의>의 역사부정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여야 한다”고 책을 낸 이유를 밝혔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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