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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투서

등록 2019-12-10 18:36수정 2019-12-11 02:38

전우용 ㅣ 역사학자

남들 싸우는 것 구경하다가 “청와대에 투서할 거야”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평생 수십번은 된다. 단언할 수는 없으나, 한국은 최고 통치자를 수신인으로 하는 익명, 또는 기명의 편지가 무척 많이 작성되는 나라에 속할 것이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대략 두가지이다. 하나는 서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이 통치자의 미덕이라고 생각해온 오랜 역사이다. 조선 시대에는 상소(上疏) 외에도 신문고, 상언(上言), 격쟁(擊錚) 등 민(民)이 왕에게 직접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또 하나는 민의 억울함을 해소해주어야 할 기관들이 오히려 제보자를 괴롭히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관리나 지역 세력가들의 범죄 행위를 신고했다가 되레 곤욕을 당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곤 했으니, 최고 통치자에게 호소하는 편이 낫다는 믿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투서(投書)를 문자 뜻대로 풀면, ‘던지는 문서’ 또는 ‘문서를 던지는 일’이다. 현재 국어사전은 ‘드러나지 않은 사실의 내막이나 남의 잘못을 적어서 어떤 기관이나 대상에게 몰래 보내는 일, 또는 그런 글’로 정의한다. 후환을 걱정하는 제보자가 익명으로 보내는 문서라는 점에서 청원서나 건의문과는 다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기명 제보도 흔히 투서라고 한다.

조선 세조 2년(1456), 이극감이라는 사람이 왕에게 각 지방에 투서함을 두어 남의 범행을 안 사람이 자유롭게 투서할 수 있도록 하자고 건의했다. 왕은 “만약 익명으로 투서하는 길을 열어둔다면 원한을 품고 거짓으로 화란(禍亂)을 몰래 꾸미는 짓이 계속 일어날 것이니, 이 일은 행할 수 없다”며 불허했다.

조선 시대에 투서는 왕에게 전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세도가나 관청에 대한 투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신문사가 공공연히 투서를 모집하기도 했다. 그러나 총독에게 투서했다는 기록은 없다. 사람들 입에 ‘청와대 투서’가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였다.

최고 통치자에 대한 투서는 여타 국가기관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다. 투서 내용의 진위를 판단하고 필요할 경우 추가 조사를 명하는 것도 민주주의 시대에 가능한 정치의 한 방식이다. 이런 일이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된 것도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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