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사회가 혼돈에 빠질수록, 그리하여 대다수 사람들이 ‘지뢰밭’에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면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 지금 확실한 것은, 경제성장이 끝난 엄연한 시대상황을 망각하고 ‘위대한 미국’을 강조하는 트럼프의 어리석음 때문에 온 세계가 더욱 넓고 깊은 ‘지뢰밭’이 될 공산이 커졌다는 점이다.
<녹색평론> 발행인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월20일 미국의 새 대통령 취임식 이틀 뒤 서구식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서구식 민주주의는 역사를 통해서 사회발전을 추동하는 힘으로 공인돼 왔지만, 이제 그것은 한계에 봉착했다. 그것은 자본가들이 이윤 추구를 위해 사용하는 무기가 되었다.”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의 의도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즉, 도널드 트럼프라는 자질이 극히 의심스러운 인물이 세계 최강의 국가 최고 통치자로 선출되는 ‘그로테스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을 이 신문의 필자는 이 기회에 중국식 정치시스템이 상대적으로 우수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는 사회주의와 마르크시즘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최신의 증거”라는 주장을 하기까지 했다. <인민일보>의 논리대로 중국의 정치제도가 서구식 민주주의보다 정말 더 나은 제도인지, 그리고 오늘날 중국이 얼마만큼 사회주의나 마르크시즘의 정신에 충실한 사회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의 중국식 정치시스템이 단지 미국식 민주주의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뒤떨어졌다’고 보는 편견은 버릴 필요가 있다. 실제로 지금 중국의 정치는 서구식 민주주의 국가와 달리 기본적으로 정치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의 중국이 집단지도체제, 즉 1인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합의제 정치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화주의를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중국은 100년 이상의 굴욕과 시련을 거쳐서 경제대국으로 부상했고, 이제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국의 비중과 역할은 막대한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조만간 미국에 필적하거나 혹은 능가할지 모른다는 예측도 설득력 있게 들리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드는 의문은 이러한 중국의 부상이 과연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경제발전 방식은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방식을 별로 벗어난 게 아니었다. 그리하여 중국도 서구인들과 마찬가지로 세계 각지에서 자원과 시장을 대규모로 확보하려 함으로써 도처에서 자연 파괴와 자원 고갈화 현상이 급속히 심화되고 있다. 따져보면, 중국도 세계자본주의의 일부인 이상, 현재 자본주의가 처한 위기상황을 공유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나라이다. 이런 현실에서, <인민일보>의 필자가 자부하듯이, 이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데 중국식 정치제도가 과연 효과가 있을까? 미국식 민주주의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게 분명해진 오늘날 중국식 시스템이 과연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아무리 봐도 트럼프의 등장은 쉽게 납득이 안 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부동산 부호일 뿐, 인간적 교양도 시민적 윤리도 완전히 결여돼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평화학자 요한 갈퉁의 말처럼, 명백히 미국의 쇠퇴를 알리는 신호이다. 선거에서는 상대가 누군지가 결과를 크게 좌우한다. 그러나 힐러리 클린턴이 트럼프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학식이나 지식, 공직 경험이 풍부한 인물임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도 결국 패했다. 왜? 다양한 분석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수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끊임없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발언을 쏟아낸 트럼프가 승리한 것은 백인 노동자들의 대폭적인 지지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지만, 그보다는 힐러리의 잠재적 지지자들이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사회적 소수파들은 대개 투표를 하지 않거나 오히려 트럼프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2억이 넘는 전체 유권자 중에서 트럼프가 받은 표는 겨우 25퍼센트였고, 기권한 사람들이 거의 절반에 육박했다. 즉, 기성의 정치시스템에 대한 철저한 불신이 지금 미국 사회에 만연돼 있는 것이다. 늘 미국의 민주주의가 이랬던 것은 아니다. 원래 건국 당시에 설계된 미국의 정치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엘리트층 위주로 설계된 측면이 강했으나 200년 이상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어쨌든 민주주의가 확고해졌다는 믿음이 광범하게 유포되어왔다. 그런데 어째서 이제 와서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혹은 환상)이 산산이 깨져버렸을까? 간단히 말하자면, 경제성장이 멈췄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식 민주주의는 원래 반민중성이 내포된 시스템이었다. 그럼에도 그게 그런대로 작동해온 것은 크게 보면 경제가 ‘성장’을 계속해왔던 덕분이었다. 성장의 혜택은 불평등하게나마 하층민에게까지 미치고 그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이제 사실상 끝났다. 경제성장의 가장 확실한 지표는 금리일 것인데, 지금처럼 저금리 혹은 심지어 마이너스 금리 상황이 회복의 전망 없이 장기화하는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던 현상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일차적인 원인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불가결한 ‘변경’(비자본주의적 영역)이 거의 다 소멸된 데 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확장되지 않으면 존속 불가능한 시스템이다. 신자유주의는 이 변경의 소멸을 경제의 ‘금융화’로 극복하려는 시도였지만, 지난 수십년간 계속된 그 ‘금융화’는 극소수 부유층에 부가 집중되는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화로 귀결되고, 정치는 거의 전적으로 부유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변질돼버렸다. 그러나 경제성장 시대의 종언은 지구의 생물물리학적 조건으로 볼 때도 이제 확실해졌다. 순환적인 원리로 돌아가는 생태계에서 직선적인 무한성장의 추구는 언젠가는 한계에 봉착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현대문명의 핵심적인 기반인 석유자원은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경제학은 가격과 돈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경제현상을 설명하지만, 기본적으로 경제는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이다. 이 사실을 명확히 할 때, 지금 나날이 고갈되고 있는 석유 문제는 결정적인 성장저해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근년에 들어 <자본주의는 어떻게 종말을 고하는가>(2016)라는 책의 저자 볼프강 슈트레크를 비롯하여 점점 많은 정치경제학자들도 자본주의의 종말을 단언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우려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인 시스템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슈트레크는 고대 로마가 망하고 중세체제가 성립하기까지 40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듯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체제가 수립되기까지 인류는 긴 ‘공백기간’의 혼돈과 시련과 고통을 겪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여기서 많은 학자·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게 있다. 그것은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사회가 혼돈에 빠질수록, 그리하여(최근 작고한 사회사상가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처럼) 대다수 사람들이 ‘지뢰밭’에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면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취임하자마자 행동에 들어갈 태세이다. 그는 국무장관으로 엑손모빌의 최고경영자를 선택함으로써 임박한 환경위기는 완전히 무시하고 화석연료자원을 거침없이 개발하여 ‘번영’을 회복하겠다는 이기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 점에서 트럼프의 국가 운영은 종래의 미국 주류 정치의 방식과 하등 다를 게 없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미국이 종전과 다른 낯선 미국이 될 거라는 예측은 근거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금 확실한 것은, 경제성장이 끝난 엄연한 시대상황을 망각하고 ‘위대한 미국’을 강조하는 트럼프의 어리석음 때문에 온 세계가 더욱 넓고 깊은 ‘지뢰밭’이 될 공산이 커졌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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