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발행인 생각하면, 참으로 감격스럽다. 120년 전 동학농민항쟁이 부패한 지배층의 퇴영적 행태와 외세의 개입으로 처참하게 패퇴한 이래 이 땅의 민초들은 늘 노예적이거나 굴종적인 삶을 강요당해왔다. 물론 잠복된 형태로 면면히 흘러온 저항정신이 분출할 때마다 우리의 하늘은 더러 맑아지기도 했으나 이내 먹구름으로 뒤덮이기 일쑤였다. 4·19가 그랬고, 5·18항쟁도 그랬다. 심지어 87년 6월 항쟁에 의한 민주화의 쟁취도 반동세력의 재등장을 돕는 방향으로 정리돼버렸다. 그리하여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를 거치는 동안 굳어진 ‘헬조선’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쩐지 ‘실패’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정서가 꽤 있는 듯하다. 이것은 아마도 철저히 평화적인 방법으로 거둔 승리의 경험에서 오는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모들, 시골에서 상경한 늙은 농부, 책가방 대신 촛불을 들고 달려온 어린 학생 등등, 지금까지 전혀 데모라는 것을 해보지 않았던 허다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참가자들이 한목소리로 ‘민주주의’를 외칠 때, 그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권력’이 생겨나는 것을 사람들은 똑똑히 경험한 것이다. 이 권력은 민중 위에 군림하는 국가기관이 행사하는 폭력적인 강제력이 아니라, 평등한 자격으로 모인 사회 구성원들의 민주적 열망이 만들어낸 ‘시민권력’이었다. 우리는 지난 몇 달 동안 이 시민권력이 어떻게 탄생하고, 그것이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극명히 보고, 느꼈다. 우물쭈물하던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고, 검찰이 모처럼 밥값을 하고, 경찰이 평소와 달리 시위대에 고분고분해지고, 그리고 (본질적으로 기득권 세력의 일부인) 헌법재판소가 전원일치로 대통령의 파면이라는 역사적 결정을 내리게 된 것도 결국 막강한 시민권력 때문이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2016~17년의 촛불혁명의 가장 큰 의의는 대통령을 파면시켰다는 게 아니라, 이 나라의 보통사람들이 시민권력이라는 게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들 다수는 각자 모래알처럼 흩어져 자신 속에 갇혀 있기를 그만두고, 광장으로 나와 저마다 ‘공적 개인’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행동할 때, 국가의 억압적 메커니즘이 무력화되고, 보다 인간적인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과정에서 가장 차원 높은 행복, 즉 ‘정치적 행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만 도달 가능한 ‘공적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집단적 정치행동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성공을 통해 사람들이 행복감뿐만 아니라 자신감을 갖고, 자신들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능력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도 이번의 촛불혁명은 정말로 위대하고,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일차적인 목적이 달성된 지금, 이 촛불혁명을 어떻게 승화시킬지, 전망은 안갯속이다.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이른바 대선주자들은 각자 자신이 잘났고, 경쟁자들은 못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이상도 비전도 보여주지 않은 채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언론들은 뉴스=상품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사소한 가십거리를 열심히 침소봉대하면서 때때로 대선주자들이 정책 경쟁 대신에 상대방 흠집 내기만 하고 있다고 상투적인 비난을 퍼붓고 있다. 다른 한편, 현학적인 학자·지식인들은 이제는 시민들이 주도하는 광장정치에서 제도권 정당정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점잖게 충고하고 있다. 제도권 정치, 즉 대의제 정당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을 하였다면, 대통령 탄핵이라는 미증유의 사태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 터인데, 이제 모든 것을 제도권 정치에 맡기자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은 기존의 정당정치, 대의제 민주주의의 파탄을 명확히 선언하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진단·분석하고, 그 위에서 이제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대안을 강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대안이란 다른 게 아니다. 촛불혁명에서 발휘된 ‘시민권력’을 어떻게 살리고, 민주주의의 영속화를 보증하는 방법으로 그것을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지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지금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제안되고 있는 ‘시민의회’라는 아이디어야말로 ‘시민권력’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제도로서 우리가 구상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대안으로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시민의회’란 기존의 국회와 별개로 존재하는―선거가 아니라 추첨에 의해 뽑힌 시민대표들로 구성되는― 말하자면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외의 제4부라고 할 수 있다. 4년 임기 내내 다음 선거에서 이기는 것 말고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현재의 무의미한 국회는, 원칙적으로는, 폐지하는 게 옳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회의 폐지도 결국은 현 국회가 결정해야 하는 문제인 이상,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타협적으로 현행 국회는 그대로 두고, 그 국회와 정부가 하는 일을 감시·통제·평가하는 권한을 가진 시민의회를 따로 설계하자는 것이다. 선거라는 것은 백번 해봤자 명망가나 재산가 등 기득권 세력이 언제나 국가권력을 독과점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평범한 시민들을 고르게 대변하려면 그 의회는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시민대표들로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작위로 뽑혔기 때문에 어떠한 이익집단들로부터도 자유로운 수백명의 평범한 시민들이, 예컨대 헌법이나 선거법 개정, 사드 배치, 남북문제, 탈핵, 4대강 문제 등등 국가의 중대한 현안에 대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활발한 토의와 충분한 숙의를 통해서 결론을 내리는 시스템, 이것이 시민의회이다(혹시 모를 시민의회의 부패와 특권화를 막는 방법은 간단하다. 임기는 길어야 1년으로 하며, 임기 후 개개 의원에 대해 엄격한 평가를 하여 책임을 묻고, 또한 임기 동안 시민의회 멤버들에게는 생활비를 지급한다 등등). 추첨으로 뽑힌 시민대표들이 의회를 구성하여 국사를 논하고, 국가기관을 통제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아이디어일지 모른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볼수록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자면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란 근본적으로 민중이, 엘리트들에게 통치를 위임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다스리는 정치제도이기 때문이다. 시민의회는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를 모방한 것이면서 동시에 아테네 민주주의의 결함, 즉 숙의의 결여를 보완한 것으로 현대사회에서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선거 때마다 탁월한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고, 결국은 실망하여 차악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딜레마에 늘 빠진다. 그 결과 지금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종언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원래 민주주의란 지도자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잘났든 못났든 민초들 자신이 공적 공간에서의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를 통해서 최선의 집단적 지혜를 얻는 방식이다. 엄밀히 말하면, 민주주의에서는 사회자가 필요할 뿐, 지도자란 필요 없는 존재이다. 추위를 무릅쓰고 우리가 몇 달 동안 광장으로 나간 것은 단지 ‘지도자’ 하나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칼럼 |
[김종철 칼럼] 시민권력과 시민의회 |
<녹색평론> 발행인 생각하면, 참으로 감격스럽다. 120년 전 동학농민항쟁이 부패한 지배층의 퇴영적 행태와 외세의 개입으로 처참하게 패퇴한 이래 이 땅의 민초들은 늘 노예적이거나 굴종적인 삶을 강요당해왔다. 물론 잠복된 형태로 면면히 흘러온 저항정신이 분출할 때마다 우리의 하늘은 더러 맑아지기도 했으나 이내 먹구름으로 뒤덮이기 일쑤였다. 4·19가 그랬고, 5·18항쟁도 그랬다. 심지어 87년 6월 항쟁에 의한 민주화의 쟁취도 반동세력의 재등장을 돕는 방향으로 정리돼버렸다. 그리하여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를 거치는 동안 굳어진 ‘헬조선’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쩐지 ‘실패’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정서가 꽤 있는 듯하다. 이것은 아마도 철저히 평화적인 방법으로 거둔 승리의 경험에서 오는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모들, 시골에서 상경한 늙은 농부, 책가방 대신 촛불을 들고 달려온 어린 학생 등등, 지금까지 전혀 데모라는 것을 해보지 않았던 허다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참가자들이 한목소리로 ‘민주주의’를 외칠 때, 그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권력’이 생겨나는 것을 사람들은 똑똑히 경험한 것이다. 이 권력은 민중 위에 군림하는 국가기관이 행사하는 폭력적인 강제력이 아니라, 평등한 자격으로 모인 사회 구성원들의 민주적 열망이 만들어낸 ‘시민권력’이었다. 우리는 지난 몇 달 동안 이 시민권력이 어떻게 탄생하고, 그것이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극명히 보고, 느꼈다. 우물쭈물하던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고, 검찰이 모처럼 밥값을 하고, 경찰이 평소와 달리 시위대에 고분고분해지고, 그리고 (본질적으로 기득권 세력의 일부인) 헌법재판소가 전원일치로 대통령의 파면이라는 역사적 결정을 내리게 된 것도 결국 막강한 시민권력 때문이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2016~17년의 촛불혁명의 가장 큰 의의는 대통령을 파면시켰다는 게 아니라, 이 나라의 보통사람들이 시민권력이라는 게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들 다수는 각자 모래알처럼 흩어져 자신 속에 갇혀 있기를 그만두고, 광장으로 나와 저마다 ‘공적 개인’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행동할 때, 국가의 억압적 메커니즘이 무력화되고, 보다 인간적인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과정에서 가장 차원 높은 행복, 즉 ‘정치적 행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만 도달 가능한 ‘공적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집단적 정치행동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성공을 통해 사람들이 행복감뿐만 아니라 자신감을 갖고, 자신들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능력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도 이번의 촛불혁명은 정말로 위대하고,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일차적인 목적이 달성된 지금, 이 촛불혁명을 어떻게 승화시킬지, 전망은 안갯속이다.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이른바 대선주자들은 각자 자신이 잘났고, 경쟁자들은 못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이상도 비전도 보여주지 않은 채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언론들은 뉴스=상품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사소한 가십거리를 열심히 침소봉대하면서 때때로 대선주자들이 정책 경쟁 대신에 상대방 흠집 내기만 하고 있다고 상투적인 비난을 퍼붓고 있다. 다른 한편, 현학적인 학자·지식인들은 이제는 시민들이 주도하는 광장정치에서 제도권 정당정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점잖게 충고하고 있다. 제도권 정치, 즉 대의제 정당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을 하였다면, 대통령 탄핵이라는 미증유의 사태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 터인데, 이제 모든 것을 제도권 정치에 맡기자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은 기존의 정당정치, 대의제 민주주의의 파탄을 명확히 선언하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진단·분석하고, 그 위에서 이제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대안을 강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대안이란 다른 게 아니다. 촛불혁명에서 발휘된 ‘시민권력’을 어떻게 살리고, 민주주의의 영속화를 보증하는 방법으로 그것을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지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지금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제안되고 있는 ‘시민의회’라는 아이디어야말로 ‘시민권력’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제도로서 우리가 구상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대안으로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시민의회’란 기존의 국회와 별개로 존재하는―선거가 아니라 추첨에 의해 뽑힌 시민대표들로 구성되는― 말하자면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외의 제4부라고 할 수 있다. 4년 임기 내내 다음 선거에서 이기는 것 말고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현재의 무의미한 국회는, 원칙적으로는, 폐지하는 게 옳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회의 폐지도 결국은 현 국회가 결정해야 하는 문제인 이상,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타협적으로 현행 국회는 그대로 두고, 그 국회와 정부가 하는 일을 감시·통제·평가하는 권한을 가진 시민의회를 따로 설계하자는 것이다. 선거라는 것은 백번 해봤자 명망가나 재산가 등 기득권 세력이 언제나 국가권력을 독과점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평범한 시민들을 고르게 대변하려면 그 의회는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시민대표들로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작위로 뽑혔기 때문에 어떠한 이익집단들로부터도 자유로운 수백명의 평범한 시민들이, 예컨대 헌법이나 선거법 개정, 사드 배치, 남북문제, 탈핵, 4대강 문제 등등 국가의 중대한 현안에 대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활발한 토의와 충분한 숙의를 통해서 결론을 내리는 시스템, 이것이 시민의회이다(혹시 모를 시민의회의 부패와 특권화를 막는 방법은 간단하다. 임기는 길어야 1년으로 하며, 임기 후 개개 의원에 대해 엄격한 평가를 하여 책임을 묻고, 또한 임기 동안 시민의회 멤버들에게는 생활비를 지급한다 등등). 추첨으로 뽑힌 시민대표들이 의회를 구성하여 국사를 논하고, 국가기관을 통제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아이디어일지 모른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볼수록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자면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란 근본적으로 민중이, 엘리트들에게 통치를 위임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다스리는 정치제도이기 때문이다. 시민의회는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를 모방한 것이면서 동시에 아테네 민주주의의 결함, 즉 숙의의 결여를 보완한 것으로 현대사회에서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선거 때마다 탁월한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고, 결국은 실망하여 차악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딜레마에 늘 빠진다. 그 결과 지금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종언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원래 민주주의란 지도자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잘났든 못났든 민초들 자신이 공적 공간에서의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를 통해서 최선의 집단적 지혜를 얻는 방식이다. 엄밀히 말하면, 민주주의에서는 사회자가 필요할 뿐, 지도자란 필요 없는 존재이다. 추위를 무릅쓰고 우리가 몇 달 동안 광장으로 나간 것은 단지 ‘지도자’ 하나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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