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책이 있을 리 없다. 다만 나는 위기에 부닥치자마자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그토록 강조했던 ‘민주적 절차’를 내팽개치고 ‘사드’의 임시배치를 서둘러 결정한 것은 매우 어리석고 서툰 자해행위였다고 생각한다. 위기상황일수록 필요한 것은 ‘리더’의 고독한 결단이 아니라 집단적 지혜의 결집이다.
<녹색평론> 발행인 문재인 정부는 다섯 달이나 계속된 평범한 시민들의 ‘촛불봉기’로 등장한 정부이다. 따라서 이 정부는 예컨대 정기적인 선거로 집권했던 김대중 혹은 노무현 정부보다 더 큰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한 정부라고 할 수 있다(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선거제도는 그 자체로 민주적 정당성을 충분히 보증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문재인 정부의 탄생과 함께 우리는 ‘헬조선’이라는 저주스러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또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의 공민적 실천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민주정부를 세웠다는 자부심까지 곁들여져 우리의 기쁨은 실로 컸다. 그러한 민주정부의 수반답게 문재인은 취임 이후 내놓은 여러 정책 제안과 조치들을 통해서 그가 왜, 어떻게 국정을 맡게 되었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취임사에서 앞으로 5년간 자신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국민의 일원’임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민주공화국의 ‘리더’란 권력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공선을 실현하는 도구, 즉 공복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상식을 들먹였다고 할 수 있지만, 굳이 이런 발언을 한 것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이 이 기초적인 상식을 망각한 ‘지도자’들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그가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취임 후 지금까지 대통령의 행보는 대체로 취임사에서 약속한 모습에서 어긋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특유의 겸손한 자세로 사회적 약자들을 껴안았고, 시민들과의 격의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는 보기 드문 민주적 리더의 자세를 유지해왔다. 그럼으로써 그는 가난하고, 억울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기 시작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약속이고, 가능성일 뿐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건 시민들의 일자리와 생계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국가에 있다는 그의 원칙적인 생각은 매우 정당하고, 기업윤리의 확립, 최저임금 인상, 과세제도 개혁 등 경제적 격차를 줄이려는 일련의 시도는 민주정부의 수반다운 성실한 태도라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문재인 정부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임은 선거 이전에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나라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기득권세력의 완강한 저항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수구세력이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한 권력, 금력, 인맥도 가공할 만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은 ‘공생’이라는 개념을 일관되게 무시해온 사회집단이다. 그들에게는 공동체라는 어휘도 낯설 뿐만 아니라, 빈부나 지위를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고 존엄한 생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거의 혹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이런 완고한 이기심과 특권의식으로 뭉친 세력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합리적으로 설명한다고 해서 그들이 동의해줄 것인가? 모처럼 민주정부의 등장으로 기분이 들떠 있으면서도 우리의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던 것은 이런 어두운 전망 때문이었다. 결국 우려했던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9월 정기국회가 열리면 개혁 법안들을 통과시켜야 할 것인데, 수구 기득권세력 때문에 법안 통과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예상보다 일찍 부닥친 암초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온 것이었다. 즉, 북한 당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한 데 이어 제6차 핵무기 실험을 강행함으로써 심각한 안보위기가 조성돼버린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지난 9년간 수구정권 집권기간 내내 후퇴를 거듭하다가 완전히 두절돼버린 남북간 교류를 재개하고, 북핵문제는 어디까지나 대화를 통해 접근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6월말 미국을 방문하여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핵문제는 대화 이외에는 해법이 없다는 점을 설명하고, 돌아와서 다시 며칠 뒤에는 베를린으로 가서 ‘한반도평화구상’을 발표하고 남북관계에 대한 새 정부의 비전과 계획을 밝혔다. 여기서도 강조된 것은 북한과의 대화였다. 그리하여 그는 “부산과 목포에서 출발한 열차가 평양과 북경으로, 러시아와 유럽으로 달릴 것”이라고 다소 낭만적인 기분으로 한반도 풍경의 미래를 그렸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의 이러한 염원은 계속해서 핵실험을 강행하고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멈추지 않는 북한 당국 때문에 좌절의 위기를 맞고 말았다. 공평하게 말하면, 9월3일 북한이 강행한 제6차 핵실험은 문재인 정부가 ‘대화원칙’을 잠정적으로나마 접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했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대화를 강조해온 문재인 대통령을 조롱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북한 핵무기 개발이 마침내 미국 본토까지 위협하는 수준에 이른 상황에서 대화를 운위하는 것은 가소롭다는 것이다(그러면서 그는 이 상황을 첨단 무기를 팔아먹을 기회로 이용하겠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불리한 처지라 해도, 문재인 정부가 “지금은 대화할 때가 아니다”라며 북한에 대한 가장 강도 높은 제재와 압박이 필요하다고 다급히 말하는 모습은 상당히 경솔해 보인다. 수구언론들은 그렇다 치고, ‘햇빛정책’을 계승할 것을 약속하고 들어선 민주정부가 따져보면 놀랄 것도 없는 북한의 제6차 핵실험에 매우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딘지 부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냉철히 생각해보자. 핵무기란 실제로 사용하는 순간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보복을 당할 게 명백한 자멸의 무기가 아닌가. 완전히 미친 인간이 아닌 이상, 그 누가 이런 식의 자멸을 선택할까? 그러므로 미국이나 한국 혹은 일본 땅에 핵무기가 실제로 투하된 상황을 생각해보자며 ‘엄청난 위협’ 운운하는 것은,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내포한, 매우 정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할 수밖에 없다. 냉전시대를 통해 인류가 배운 게 있다면, 그것은 핵무기의 효과는 기본적으로 억지력에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지금 북한의 집요한 핵무기 개발은 무엇보다 자기방어를 위한, 나아가 미국에 대한 ‘교섭력’을 높이려는 의도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게다가 그 북한을 상대로 한 어떠한 제재도 실효가 없다는 것도 명백해졌다. 중국이 적극 가담하여 ‘원유공급’을 중단하면 북한이 굴복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국가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이다. 미국도 일본도 한국도 모두 자기 국익을 내세우면서 중국만은 예외가 되라고 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그러면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언론을 통해 숱한 의견들이 개진되고 있지만 대개는 정부가 지혜롭고 강인하게 이 엄중한 상황을 관리해야 한다는, 결국 하나 마나 한 소리들이다. 하기는 묘책이 있을 리 없다. 다만 나는 위기에 부닥치자마자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그토록 강조했던 ‘민주적 절차’를 내팽개치고 ‘사드’의 임시배치를 서둘러 결정한 것은 매우 어리석고 서툰 자해행위였다고 생각한다. 그 결정으로 중국과의 불편한 관계가 더욱 해소되기 어렵게 된 것도 작은 문제가 아니지만, 무엇보다 문재인 정부의 신뢰성에 큰 균열이 생긴 것은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위기상황일수록 필요한 것은 ‘리더’의 고독한 결단이 아니라 집단적 지혜의 결집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엊그제 발표된 ‘한반도 평화를 위한 5대 긴급제안’에서 정의당 이정미 대표가 했던 말과 같다. “힘이 부족하면 국민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우리는 기꺼이 도울 준비가 돼 있습니다.” [관련 영상] 한겨레TV | 더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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