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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09 18:13 수정 : 2018.01.08 11:12

김종철

쇠퇴하는 민주주의를 살리는 방법으로 ‘숙의민주주의’는 오늘날 불가결한 제도가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숙의민주주의’의 도입은, 촛불이 아니었다면, 정부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공론조사가 거듭되고 참가자가 많아질수록 전반적인 정치적 수준은 높아질 것이 확실하다.

트럼프가 극진한 환대를 받고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떠나자 정부도 언론도 안도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예상과 달리 비교적 온건한 언행을 보여주고 떠났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이 온건함의 배후에 값비싼 첨단무기를 팔게 된 트럼프의 ‘성공적인 거래’가 있었음을 생각하면 씁쓸하다. 정부는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식으로 임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마냥 이런 굴욕적인 자세로 가는 게 옳을까?

그런데 희극적이게도 그 트럼프는 언제 기소될지, 언제 탄핵당할지 모르는 사람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27명의 정신건강 관련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증례>라는 책까지 써냈다. 이 책의 발간 이유는, 정신적으로 극히 불건강한 인물에게 핵무기 사용 명령권이 있는 대통령직을 맡겨놓는 게 너무나 위험해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트럼프는 지금 정치적으로 큰 곤경에 처해 있다. 그렇기에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상인적 재간을 최대한 발휘하여 미국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야 할 다급한 필요를 느끼고 있을 텐데, 그런 그에게 아마도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한반도 긴장 상태를 한껏 이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기괴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저런 인물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는 나라가 과연 어떤 나라인지 좀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오랫동안 민주주의, 인권, 자유를 표방하는 지도적인 국가로 세계에 군림해왔고, 어느 정도는 그 지도력이 먹혀들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이 민주주의를 참칭할 수 있는 자격은 거의 다 없어졌고, 세계를 지도할 어떠한 권위도 명분도 상실했음이 분명하다. 다만 아직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계속 ‘빅브라더’로 군림하려는 욕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픈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는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서양인으로부터 이런 지독히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아무 항변도 할 수 없는 세월을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세계에는 한국만큼의 민주주의 국가도 드물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지금 한국은 미국보다도, 일본보다도 양질의 민주정부를 가졌다고 할 수 있으니까.

전반적으로 민주주의가 쇠퇴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예외가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촛불혁명’ 덕분이다. 생각할수록 이것은 ‘한강의 기적’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기적이다. 작년 이맘때 촛불이 타오르기 전 우리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땀 흘려 일하는 이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지고, 자살률이 세계 최고인데다가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헬조선’을 부르짖는데도, 국가를 사유화한 수구세력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들의 영구적 집권이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에 맞서 싸워야 할 야당은 나태와 무기력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국정농단 사태가 터졌고, 촛불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 이후의 경과는 다 아는 대로이다.

그러나 촛불혁명은 아직 진행 중일 뿐, 지금까지는 ‘민주정부’의 탄생 자체가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이다. 왜냐하면 민주정부란 우리가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땅으로 가기 위한 절대적인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부가 아직도 내각 구성조차 완료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썩고 문드러진 구체제를 발본적으로 혁파하고 ‘적폐’를 청산하려는 시도가 험난할 수밖에 없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오랜 세월 온갖 특권을 누려온 수구세력의 결사적인 저항 때문에 모처럼의 개혁 노력이 실패로 끝나는 경우는 역사에서 허다히 볼 수 있다. 이른바 진보파 언론들이 지금 문재인 정권더러 연일 야당과 현명하게 협치 내지는 타협을 하라고 권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말은 쉽지만, 수구세력은 차치하고라도 ‘새정치’를 표방하며 정치에 뛰어든 유력한 야당 대표의 입에서도 ‘적폐청산’ 노력을 이전 정권들에 대한 ‘복수’라고 규정짓는 몰상식한 발언이 나오는 상황에서, 어떤 ‘현명한’ 협치나 타협이 가능할까? 결국 이 딜레마를 극복하는 길은 문재인 정부를 출현시킨 원동력, 즉 ‘촛불혁명’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지 않을까?

실제로, 지난 수개월간의 문재인 정권이 이룬 최고의 업적이 촛불정신에 가장 충실한 것이기도 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즉,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탈핵국가로 갈 것을 선언하고, 신고리 원전 5·6호기의 공사를 일시 중단시킨 다음, 그 재개 여부를 시민들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한 결정 말이다. 그리하여 공론조사위원회가 조직되고, 그 위원회의 주선으로 전국의 평범한 시민들 500명이 제비뽑기 방식으로 선정되어 석달간의 숙고와 토론을 거쳐 마침내 10월20일에 그 결론이 공표되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나는 지난 수년간 줄곧 ‘숙의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이야기해왔기 때문에 정부의 공론조사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무척 놀랐다. 민주정부라고 하지만, 이처럼 선선히 이 아이디어를 채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대의제 민주주의가 대다수 민중의 신뢰를 잃은 것은, 간단히 말하면, 선거로 뽑힌 정치가들이 자기들의 개인적·정파적·계급적 이익만 챙길 뿐, 민중의 삶의 요구에는 거의 혹은 전혀 응답하지 않는 과두 금권지배 체제로 변질·타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타개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많은 지식인들이 생각하고, 실제로 여러 국가나 공동체들에서 기왕에 실행되고 있는 것이 다양한 형태의 ‘숙의민주주의’인데, 그 공통점은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평범한 시민들이 ‘미니-퍼블릭’을 구성하여 거기서 국가나 지역공동체의 중대사를 숙고와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결정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무작위 선출에 의한 시민대표단의 구성이다. 즉, 현재 많은 나라의 배심원 재판 제도를 정치적·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데까지 확장한 의사결정 시스템인 셈이다. 집단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숙명적인 조건을 생각하면, 인간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결정 절차라고 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이 자기의 삶에 관계된 중대한 문제를 자기들 손으로 결정하느냐, 아니면 과두 지배층에게 맡겨놓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가 중요하고, 쇠퇴하는 민주주의를 살리는 방법으로 ‘숙의민주주의’는 오늘날 불가결한 제도가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숙의민주주의’의 도입은, 촛불이 아니었다면, 정부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항간에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원전문제 처리를 시민들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정부의 ‘꼼수’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러나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물론 이번 공론조사가 공사 재개 쪽으로 결론이 난 것은 매우 실망스럽지만, 그것은 여전히 한국 사회가 경제논리의 압도적인 지배하에 있음을 가리키는 증표로 봐야 할 듯하다.

하지만 공론조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결론에 관계없이, 이번의 경험이 너무도 감동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난생처음 국가적 의제를 논의·결정하는 데 능동적인 참여를 한 데서 오는 ‘시민적 행복감’의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론조사가 거듭되고 참가자가 많아질수록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정치적 수준은 갈수록 높아질 것이 확실하다. 그 결과, 원전 문제뿐만 아니라 온갖 국내외적 이슈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주체는 평범한 시민들 자신이라는 자긍심을 우리 모두가 갖게 될 날이 조만간 올 것이다.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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