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상’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현재 베를린의 도시 중심부에 나치독일의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비들이 세워져 있듯이, 위안부 관련 ‘소녀상’은 서울이나 부산이 아니라 도쿄나 오사카에 세워져 있는 게 마땅하고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한-일 양쪽 정부가 타결했다는 2015년 12월의 이른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라는 게 터무니없이 엉터리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난 12월27일 특별검증팀이 발표한 조사결과를 보면, 그것은 정부 간의 정당한 합의라기보다는 아베 정권의 근본적인 부도덕성과 박근혜 정권의 극단적인 무책임과 어리석음이 결합함으로써 발생한 외교적 참사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도 이 부실한 합의에 대한 검증결과가 발표되자마자 일본 정부는 물론, 일본의 주요 언론들도 일제히 비난과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정부 간의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게 마땅하니 한국은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지 말고 합의사항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트럼프의 파리기후협약 탈퇴에 대해서는 침묵해왔으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미개한 짓은 그만두고 국제적 룰을 준수하라”는 무례한 말까지 하는 언론도 있다. 그 와중에 아베 총리는 자기는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극히 난폭한 언사로써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한국의 몇몇 ‘보수파’ 언론도 일본 언론과 유사한 반응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정작 큰 문제는 경위조사란 이름으로 외교상 넘어선 안 될 선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30년 동안 비밀에 부쳐야 할 외교문서가 2년 만에 까발려졌다. 앞으로 문재인 정부는 물론, 향후 모든 정권의 외교에 큰 짐이 될 게 분명하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나라가 한국 정부를 믿고 비밀스러운 거래를 할 수 있겠는가.”(<중앙일보> 사설 2017년 12월28일자)
물론 이런 우려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비밀스러운 거래’를 공개해버린 결과로 장차 국가의 외교 능력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하지만 국가 간의 교섭은 기본적으로 호혜 원칙에 의거한다는 것, 그리고 정부 간의 ‘비밀’이란 흔히 민심과 동떨어진 권력자들끼리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보수파’ 언론들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완전히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즉, 위안부 문제는 결코 조약이나 합의의 준수라는 외교적 원칙이나 국익 따위의 차원에서 논할 테마가 아니라는 게 그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위안부 문제’란 국가권력이 무고한 여성들을 강제로 또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전쟁터의 ‘성노예’로 만들어 그 여성들의 하나뿐인 삶을 속속들이 망가뜨린 극단적으로 반인륜적인 만행에 관련된 문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피해 당사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가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우리들 모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공동체가 성립하는 데는 반드시 물리적 토대만이 필요한 게 아니다.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공동체의 도덕적·윤리적 토대이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은 결국 이 윤리적 토대를 뒤늦게나마 복원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한-일 간의 단순한 외교문제도 아니고, 이른바 국익에 관한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을 막론하고 인간다운 삶이 어떤 것인가를 사유할 능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위안부를 기리는 ‘소녀상’이 세워진 것도 바로 그러한 보편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 점을 직시하지 않으려 한다. 아직도 국가주의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꽤 양식 있어 보이는 인사들도 이 문제에서는 이상하게도 퇴영적인 자세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독일처럼 일본도 전쟁 중에 피해를 입은 이웃나라들에 깨끗이 사과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독일과 일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독일이 사과한 것은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홀로코스트’ 때문이지 전쟁을 일으킨 책임 때문이 아니다. 역사상 전쟁을 일으켰다고 사과를 한 나라는 없다.” 그리고 소수지만 전쟁책임에 대해 발언하는 양심적인 지식인들도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국이 인도에 대한 식민지적 지배에 대해 사과한 일이 있느냐 하는 게 그들의 논리다. 더욱이 오늘날 일본은 내셔널리즘을 졸업했지만, 한국이나 중국은 아직도 내셔널리즘이라는 ‘불합리한’ 정서적 감옥에 갇혀 있다고 경멸조로 말하는 일본 지식인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들이 늘 하는 얘기가 있다. 이제는 그만하자고,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 있을 것이냐고. 한 번도 제대로 사과를 하지도 않고, 역사교육도 제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협력과 연대가 과연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때 ‘동아시아공동체’라는 아이디어가 한-일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한 적이 있다. 물론 유럽연합을 염두에 둔 발상이지만, 유럽연합의 실현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자신의 역사적 과오를 솔직히 반성한 독일인들의 겸허한 자세였다. 위안부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은 결국, 자신들에게 사죄해야 할 과오가 없다는 일본인들의 오만함 때문일 텐데, 그러한 뒤틀린 감정의 구조를 그대로 둔 채 동아시아 국가들의 선린관계를 꿈꾸어봤자, 그것은 헛일일 수밖에 없다.
사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 측의 근본적인 태도 변화가 없는 한, 한국 정부가 할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지금 한국의 언론들은 문재인 정부의 지혜로운 대응을 요구하고 있지만, 자기의 역사에서 듣기 싫고 보기 싫은 것은 아예 없던 사실로 치부하고자 하는 얕은 정신의 소유자들과 어떤 대화 혹은 협상이 가능할까. 실제로 오늘날 일본의 학교에서는 근현대사를 거의 가르치지도 않고, 일본의 고교졸업생 중 한반도가 왜 분단되었는지 내력을 이해하는 젊은이들이 드물다고 한다. ‘소녀상’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현재 베를린의 도시 중심부에 나치독일의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비들이 세워져 있듯이, 위안부 관련 ‘소녀상’은 서울이나 부산이 아니라 도쿄나 오사카에 세워져 있는 게 마땅하고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거꾸로, 최근 샌프란시스코의 소녀상 설치에 반발하여 오사카 시장은 샌프란시스코 시와 기왕에 맺어온 자매관계를 파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마침 올해는 메이지유신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메이지유신은 원래 ‘삿초번’의 무사들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그리하여 정치적 정통성의 결여라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들이 급조한 것이 천황제 국가주의, 그리고 ‘정한론’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조선 침략과 지배였다. 그 결과, 한반도는 물론 아시아 전체에 걸쳐 풀뿌리 민중의 삶은 오랫동안 참혹하게 유린되고 뒤틀려왔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실제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재일조선인 역사학자 김정미는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전쟁에 대해 사죄를 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로, 만약 제대로 사과를 했을 때 그에 따른 보상 내지 배상은 현재 일본의 경제력으로는 감당하기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었다. 그토록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크고 광범했다는 뜻이다.)
일본의 상당수 지식인들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반인륜적 만행에는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논리는 역사란 결국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이 책임져야 할 문제임을 무시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위안부 문제에 관해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계속 묻는 것은 내셔널리즘도, 국가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인륜을 망각한 삶은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같은 논리에 입각하여 우리는 베트남에서 저지른 한국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도 솔직히 그리고 철저히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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