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라는 곳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온 것에 현재의 집권당은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묻는 것은 국가나 사회가 인간다운 공동체로서 성립하는 데 불가결한 최소한의 윤리적 토대, 즉 ‘공공심’의 결여를 드러내는 행태가 꼭 수구파 정치인들만의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녹색평론> 발행인 2016년 겨울에서 이듬해 봄까지 우리가 추위를 무릅쓰고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여든 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단지 국가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무지·무능하고 무책임한 정권을 규탄하고 탄핵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래서 정권을 바꾸는 것, 그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었던가. 물론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이 나라 지배층의 부패와 거짓과 위선에 오랫동안 진저리를 치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공정한 정치’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자 광장으로 뛰쳐나갔던 것이다. 되돌아보면, 금년은 참으로 감격적인 해였다. 오랫동안 적대했던 남북의 정상이 세 차례나 만나 친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북·미 정상도 한 차례지만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에 가까이 다가선 이 역사적인 상황 전개는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가 아니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 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자신의 역사적 소명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행동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남북문제를 풀겠다는 의지와 결단력,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바쳐온 끈질긴 노력과 지혜가 왜 이 사회 내부에서는 발휘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왜 출범 후 계속해서 누리던 높은 지지율이 떨어지고, 갈수록 이 정부와 집권당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는가? 하기는 문재인 정부의 앞날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꽉 막힌 남북 간의 관계를 트는 일은 대통령의 철학과 의지만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만, 이 사회 내부의 첨예한 갈등과 대립은 몇 갑절의 인내심과 용기와 지혜를 요구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촛불의 힘이 국회를 바꾸는 데까지는 가지 못한 결과로 부패한 수구세력이 국회의 의석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부자연스러운 정치상황도 계속될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수구세력이 새 정권의 개혁 노력에 끊임없이 찬물을 끼얹을 것임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문재인 정권이 야당과 ‘협치’를 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공언하는 식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정치인들에게 우리가 과연 ‘협치’를 기대할 수 있을까? ‘협치’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 교양과 인간적 자질이 그들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엊그제 국회의 예산소위에서 기막힌 장면을 연출한 어떤 의원의 행태는 결코 예외적인 게 아니었다. 한부모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책정된 새해 예산 61억원을 전액 삭감할 것을 주장하고, 자신의 지역구 사업비로는 800억원대의 예산을 챙겼다는 의원 말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한부모 지원 사업도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정부의 고용문제를 계속 악화시킬” 목적으로, 관계 공무원이 “예산을 삭감하면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고 간곡히 호소했음에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지금 이 나라의 정당정치는 사실상 끝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당이니 정치니 하는 것은 최소한의 이성과 상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회라는 곳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온 것에 현재의 집권당은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묻는 것은 국가나 사회가 인간다운 공동체로서 성립하는 데 불가결한 최소한의 윤리적 토대, 즉 ‘공공심’의 결여를 드러내는 행태가 꼭 수구파 정치인들만의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금 선거법 개정을 둘러싸고 제1, 2당이 보여주는 비열한 모습, 그중에서도 특히 집권당 대표가 드러내는 정직하지도 공정하지도 못한 모습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동안 익히 보아왔던 거짓과 위선의 정치로는 우리 사회가 절대로 좋은 사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를 개선하자면, 가장 필요한 현실적인 방책이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이라는 점은 양식이 있는 학자, 지식인, 정치가들이 대부분 공감하고 있다. 이는 선거관리위원회의 권고사항일 뿐만 아니라, 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공표했던 핵심적인 공약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집권당 대표라는 이가 이 공약의 이행에 앞장서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무산시키려 하고 있다.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치가들이 이해득실을 저울질하고, 그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하거나 않거나 하는 것을 우리가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집권당이 오랫동안 늘 취해왔던 자세가 있다. 즉, 자신들이 민주주의자라는 것, 그리하여 자신들이 지향하는 것은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라는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촛불혁명을 완성해줄 것으로 믿고 우리는 그들에게 국가운영의 책임을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들의 정파적 이익 때문에 그들은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려 하고 있다. 왜 그럴까? 보도에 의하면, 최근 집권당 대표는 어느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조대왕 돌아가신 1800년 이후에 제대로 된 개혁·민주 세력이 집권한 건 딱 10년밖에 없다. 이번 기회를 우리가 놓치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반드시 우리가 잘 준비해서 내후년 총선에서 압승 거둬 가지고 2022년 대선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는 그런 준비를 지금부터(하자)”라고.(<한겨레> 11월28일치) 요컨대 ‘20년 집권’을 위해서는 비례성이 제거된 승자독식 제도가 낫다고 생각하기에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이 싫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약의 이행을 거부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가장 합리적인 정치개혁이라고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동의하는 제도의 도입을 배척하면서, 이 집권당 지도자가 꿈꾸는 좋은 나라란 어떤 나라일까? 정치적 약속에 책임을 지고 매사에 사심 없는 공공심으로 임하는 것 자체가 좋은 나라, 좋은 사회를 만드는 첫걸음임을 망각하고, ‘정조대왕’ 운운하는 이 발언에는 야바위판 같은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의 수준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는 지혜는커녕 여야의 원시적 대립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게 분명한 독선적인 태도만 날것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런 식의 태도로 현 집권당은 당면한 난국을 어떻게 뚫고 나가겠다는 것일까? 한심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유명한 논문을 쓴 정치사상가이다. 그는 1990년대 초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붕괴하자 이제 인류에게 남은 유일한 가치 있는 정치체제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라고 주장했으나, 실제로 21세기로 넘어오면서 그 민주주의가 세계 전역에서 쇠퇴일로를 걷는 모습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쇠퇴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 또 두 권의 두꺼운 책을 썼다. 그 책들 속에서 그는 “안정되고 평화롭고 번영하는” 국가사회를 위해서는 법치와 함께 무엇보다 공정성에 기반을 둔 책임정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는 8세기에 일부 이슬람 국가들에서 행해졌던 특이한 정치적 관행을 주목한다. 즉, 그 국가들에서는 일부러 국외에서 노예들을 수입하여 그들에게 정치를 맡겼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것은, 외래객인 노예들에게는 아무런 사적인 연고도 이해관계도 있을 수 없으므로, 그들에 의한 정치는 그야말로 공정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의 진의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정치의 생명은 공평무사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후쿠야마가 꼽는 건전한 국가사회의 상징은 덴마크이다. 참고로, 오늘날 덴마크의 국회의원은 전원 비례대표제로 선출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다 할 특권도 없이 평균적인 급료를 받으며, 한 명의 비서가 두 의원을 보좌하는 시스템 속에서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국가에 봉사하는 것 자체를 영예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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