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로스엔젤레스 다저스의 경기장에 락그룹 ‘건즈 앤 로지스'의 <웰컴 투 더 정글>이 울려 퍼지면 관중은 안도의 환호성을 질렀다. 마무리 투수 에릭 가니에(Eric Gagn?)의 등장을 울리는 주제곡이기 때문이었다. 그 해 가니에는 불을 끄는 소방수 역할에서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가 투수석에 서면 별명 그대로 ‘경기 끝(Game Over)’이었다.
1995년부터 다저스에서 뛰던 가니에는 2001년까지 그런저런 선발 투수였다. 하지만 2002년 보직을 바꾸고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방어율 1.20, 세이브 55개의 기록으로 가장 뛰어난 투수에게 수여하는 사이영 상을 받았고,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 동안 블론 세이브(blown save; 마무리 투수가 동점이나 역전을 허용해 세이브 기회를 날리는 것) 없이 연속으로 84개의 세이브를 달성하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다.
에릭 가니에가 84 연속 세이브 기록을 세우는 장면.
이후 부상으로 기량의 부침을 보이면서 가니에의 명성은 흔들렸고, 2007년 '미첼 보고서(Mitchell Report)'가 발표되면서 이름 값은 아예 바닥에 떨어졌다. 미국 상원의원 조지 미첼이 프로야구 선수들의 금지 약물 복용 실태를 조사했는데, 그가 성장 호르몬(growth hormone)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한때 뉴욕 양키스의 ‘수호신’ 마리아노 리베라와 함께 마무리 쌍벽이라 불렸던 그의 불꽃 같은 속구와 환상적인 체인지업이 약발이었다는 사실에 많은 팬들이 실망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매일 밤 나는 주삿바늘을 다리에 찔러야 했습니다. 밤마다, 일주일 내내, 3년 동안 그랬지요."[1]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Lionel Messi)의 키는 170센티미터이다. 모국 아르헨티나 남성의 평균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키이다. 그러나 그는 날쌔고 균형 잡힌 몸놀림, 예측할 수 없는 드리블, 허를 찌르는 패스, 한 박자 빠른 슈팅으로 경기장에서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선수들을 능가하고 있다. 압도적인 활약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출연했던 광고의 문구 ‘불가능,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메시가 출연한 아디다스 광고 ‘불가능,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메시는 어릴 적부터 뛰어난 축구 재능을 선보였지만, 늘 또래에서 제일 작았다. 단신인 이유는 11세에 밝혀졌다. 그는 성장 호르몬 결핍증을 앓고 있었다. 머리 속 뇌하수체(pituitary gland)에서 분비되는 성장 호르몬은 어린이와 청소년에서는 뼈와 연골이 자라도록 돕는다. 또한 모든 연령 대에서 단백질 생성을 자극하고, 지방의 분해를 촉진하며, 인슐린의 작용을 방해하여 혈중 당분의 수치를 올린다. 일련의 변화는 성장 호르몬이란 이름 그대로 인체 내에서 성장을 도모한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키가 자라지 않는 것은 큰 문제였기에 메시는 매일 밤 다리에 성장 호르몬이 담긴 주사기의 바늘을 꽂는 치료를 시작했다. 치료는 효과적이었지만, 월 150만원 이상 드는 비싼 가격은 또 다른 문제였다. 소속 유소년 팀이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약 2만원만 건넨 입발림에 그쳤다. 다행히 그는 13세 때 의료비 지원을 약속한 스페인의 에프시(FC) 바르셀로나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당시 무모해 보이던 바르셀로나의 결정은 훗날의 역사가 증명하듯 대성공이었다.
메시와는 반대로 몸에서 성장 호르몬이 넘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키가 크게 되는데, 국내 최장신(205센티미터) 여자 농구 선수 김영희가 극단적인 예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던 그는 6학년 때 키가 이미 180센티미터를 넘었고, 태극 표지(마크)를 달던 고 2때 키는 198센티미터에 달했다. 전성기 시절 김영희는 '코끼리 센터'로 불리며 맹활약했다. 1984년 농구 대잔치에서는 5관왕(득점왕, 리바운드왕, 자유투상, 인기상, 최우수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소속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국제 대회에서도 대들보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1982, 1986 아시안게임과 1984 올림픽에서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김영희의 몸에 성장 호르몬이 넘친 이유는 뇌하수체의 종양 때문이었다. 머리 속 종양이 계속 자라며 성장 호르몬을 끊임없이 분비했던 것이다. 그 결과 부모의 키는 각각 165, 163센티미터였지만, 그는 몸집이 커지는 거인증(gigantism)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뒤에는 성장판이 닫히면서 뼈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말단 부위만 커지는 말단비대증(acromegaly)이 발생했다. 손과 발이 굵어지고, 앞이마와 턱이 튀어나오면서 얼굴 모양이 바뀌었는데, 한때 씨름계를 평정했던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의 얼굴에서도 이런 특징이 나타난다.
이웃집 할머니와 같이 사진을 찍은 김영희(좌측)의 외양에서 거인증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한겨레 제공.
1984년 올림픽이 끝난 뒤부터 김영희의 거인증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체중이 120킬로그램까지 늘어나 정상적인 훈련을 받을 수 없었고, 몸 여기저기에서 통증과 마비 증상이 발생했다. 1987년 그는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아 병원을 방문했고, 뇌의 종양이 시신경을 누르고 있어 실명 위기란 이야기를 들었다. 급하게 뇌수술을 받게 되었고 결국 은퇴식도 없이 쓸쓸히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신체 성장에 관여하는 성장 호르몬은 과부족에 따라 특정 종목에 유리한 체형을 만들 수 있다. 성장 호르몬의 부족은 메시라는 축구 천재의 떡잎을 앗아갈 뻔 했지만, 다행히 적절한 의학적 치료를 통해 그는 될성부른 나무로 자라났다. 반면에 김영희는 성장 호르몬의 과잉으로 농구장의 아름드리 나무가 되었지만, 불행히도 푸르렀던 시간은 길지 못했고 지금까지 고통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다.
멀리하기엔 넘치는, 그러나 치명적인 매력
“와우, 이건 엄청난 물건인데! 근육을 계속 만드는 데는 최고야.”[2]
메시나 김영희는 선천적으로 성장 호르몬에 문제가 있었기에 빼어난 실력을 선보였다 하더라도 도핑과는 거리가 멀다. 일반 선수들이 경기력 향상을 목적으로 성장 호르몬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로 알려져 있다. ‘스테로이드 대가(guru)’로 불리던 육체미 선수 댄 듀세인(Dan Duchaine)이 자신과 제자들에게 직접 성장 호르몬을 투여하며 효과를 경험한 뒤 주변에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훗날 육체미 선수들의 필독서가 된 그의 책 <언더그라운드 스테로이드 핸드북>(Underground Steroid Handbook)에서 그는 10주 사용으로 근육이 13~18킬로그램 증가했다고 밝혔다.[2]
이후 성장 호르몬은 선수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유명한 예로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단백동화남성화 스테로이드 복용으로 금메달을 박탈당한 캐나다의 벤 존슨은 성장 호르몬도 같이 사용했다. 올림픽이 끝난 뒤 약물 실태를 조사한 캐나다의 찰스 듀빈(Charles Dubin)은 그의 이름을 딴 ‘듀빈 조사회 보고서(Dubin Inquiry report)’에서 선수들의 성장 호르몬 사용을 막기 위해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3] 하지만 이후에도 육상, 미식축구, 자전거 경주, 프로야구 등 여러 종목에서 불법적인 사용은 계속되었다. 오죽하면 선수들 사이에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이 ‘성장 호르몬 대회'로 불렸을까.[4]
그런데 과학자들은 성장 호르몬을 애용하는 선수들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성장 호르몬이 실제로 경기력 향상에 도움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논문 44개를 검토한 연구를 살펴 보자.[5] 총 303명이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았고, 성장 호르몬을 맞지 않은 대조군 집단은 137명이었다. 20일 뒤에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은 집단에서 제지방체중(lean body mass; 체중에서 지방의 무게를 뺀 것)이 평균 2.1킬로그램이 증가했다. 와우! 그러나 몸이 보기 좋게 바뀌었을 뿐 실질적인 힘이나 운동 능력의 향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성장 호르몬 치료를 받은 집단은 체액(체내의 액체)이 늘어나면서 오히려 부종과 피곤함을 더 많이 호소했다.
하얀 연구복을 걸친 사람들과 짧은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의 입장은 왜 다를까? 단백동화남성화 스테로이드 관련 연구에서 그랬듯이 연구실이라는 환경은 제한점이 많아 실제 운동장을 그대로 재현하기 어렵다. 과학자는 성장 호르몬의 부작용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생리적인 농도를 벗어나는 용량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어렵다. 반면 선수들은 더욱 많은 용량을 더욱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실질적인 혜택을 맛보았을 수 있다.
단백동화남성화 스테로이드와 성장 호르몬을 함께 사용했던 미국프로야구(MLB)의 배리 본즈를 떠 올려 보자. 그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뛰는 동안 모자 크기는 57에서 58센티미터로, 신발 크기는 285에서 310밀리미터로 늘어났다.[6] 머리 둘레가 늘어나고 발의 길이가 커진 것은 말단비대증의 증상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부작용이 나타날 정도로 성장 호르몬을 사용해야 비로소 경기력이 향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이언츠에 입단할 때와 달리 머리를 밀었는데도 본즈의 모자 크기는 오히려 커졌다. 한겨레 제공.
아울러 성장 호르몬은 부상 입은 인대나 건의 회복을 돕는 측면에서도 선수들에게 매력적이다. 과학계가 아직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지만, 선수들은 언제나 과학자들을 앞서가지 않았던가. 다른 종목에 비해 미국 프로야구에서 성장 호르몬 파문이 유독 많았던 것을 떠올려 보자. 약 6개월 동안 팀당 160개가 넘는 경기를 치르는 빽빽한 일정 속에서 부상의 영향을 줄이는 것은 성적과 직결되기 마련이다. 이래저래 선수들은 성장 호르몬의 치명적인 매력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인기의 속사정은 따로 있다
에릭 가니에는 2008년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당시 10세이브, 3패, 7블론 세이브, 방어율 5.44라는 매우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한때 철벽 마무리를 상징했던 별명 ‘게임 끝’은 ‘그가 등장했으니 경기에서 지겠구나’라는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팔꿈치, 엉덩이, 어깨 부상 및 여러 차례의 수술도 기량 하락의 원인이었겠지만, 성장 호르몬의 도움을 더 이상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의구심을 떨쳐 내기가 쉽지 않다.
성장 호르몬은 신체 신진대사에 필수적인 성분이다. 부족하면 리오넬 메시와 같은 왜소증을, 과다하면 김영희와 같은 거인증을 유발할 수 있다. 즉 부족해도 과해도 모두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종잇장 같은 실력 차이도 명확한 승패나 등수로 연결되는 운동 경기에서 선수들이 경기력에 도움되는 성장 호르몬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말단비대증과 같은 부작용이 발생한다고 아무리 경고해도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선수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런데 성장 호르몬이 선수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인기를 누리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준비하던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의 경기 외적인 고민이 여기에서 비롯했다.
(②부에서 계속)
최강/정신과 의사 ironchoi@hanmail.net
1. Balague, G., Messi. Orion, 2013: p. 86.
2. Duchaine, D., Underground Steroid Handbook. Power Distributors, 1982.
3. Dubin, C.J., Commission of Inquiry into the Use of Drugs and Banned Practices Intended to Increase Athletic Performance. Canadian Publishing Center, 1990.
4. Zorpette, G., All doped up ? and going for the gold. Sci Am, 2000. 282: p. 20?22.
5. Liu, H., et al., Systematic review: the effects of growth hormone on athletic performance. Ann Intern Med, 2008. 148(10): p. 747-58.
6. Fainaru-Wada, M. and L. Williams, Game of Shadows: Barry Bonds, BALCO, and the Steroids Scandal that Rocked Professional Sports. Penguin Publishing Group, 2006: p. 277.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