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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31 08:59 수정 : 2019.05.31 17:53

성장 호르몬으로 경기력 향상을 추구한 럭비 선수 테리 뉴튼과 청춘의 회복을 도모한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최강의 약물의 유혹, 도핑의 과학]
15화 성장 호르몬 ② 뉴튼과 스탤론

성장 호르몬으로 경기력 향상을 추구한 럭비 선수 테리 뉴튼과 청춘의 회복을 도모한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2006년 월드컵 대표팀에서 있었던 일

2006년 독일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딕 아드보카트는 대표팀 주치의와 갈등했다. 선수들의 건강을 담당하는 주치의 김현철이 성장 호르몬 성분의 주사 사용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1989년부터 사용을 금지했고, 세계반도핑기구(WADA)의 금지 약물 목록에 올라 있는 성장 호르몬이 선수들에게 투여되는 것을 감독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김현철의 생각은 달랐다. 선수들의 피로 회복을 돕기 위해 각별히 신경을 써서 다섯 상자(주사액 병 500개)나 준비했는데도 외국인 감독이 ‘자기 안녕’을 위해 이기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여겼다. 그래서 원하는 선수들에 한해 몰래몰래 주사를 놨고, 나이 많은 선수들은 앞다퉈 그에게 팔을 내밀었다. 꼭 주사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우리나라 대표팀은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원정 1승이라는 귀한 성과를 거두었다.

김현철의 주장에 따르면, 약물로 경기력 강화를 꾀하는 도핑이 공공연하게 이뤄진 셈이다. 약물 검사에 대한 염려는 없었을까? 그는 나름의 방책을 갖고 있었다.

“명색이 주치의인데 도핑 정도를 생각 안 했겠습니까. 이미 직원들에게 주사를 놓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보내 도핑 테스트를 했죠.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도핑컨트롤센터는 세계적 수준이라 거기서 안 걸리면 FIFA(국제축구연맹) 도핑에 걸릴 리 만무하거든요.”[1]

경기력 향상 약물로서 성장 호르몬의 또 다른 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조금만 조심하면 검사에 적발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선수들이 성장 호르몬을 애용하는 것이다.

성장 호르몬 분비, 시간 따라 사람 따라 널뛰기

2000년 10월 이탈리아의 한 잡지는 시드니 올림픽이 개최되기 전에 정상급 운동선수 61명의 성장 호르몬 수치가 높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금메달리스트 다섯 명도 포함된 뉴스는 이내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대규모 도핑이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금메달을 딴 32세 여성 자전거 선수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이런 우려를 불식시켰다.[2] 집에서 연구소까지 150킬로미터를 달린 뒤의 성장 호르몬은 정상치를 훌쩍 뛰어 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감소했고, 편안히 쉴 때의 측정치는 정상 범위 이내였다.

몸에서 많이 검출된다고 해서 꼭 도핑이 아닌 이유는 성장 호르몬만의 특징 두 가지 때문이다. 먼저 성장 호르몬은 뇌하수체에서 일정하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박동 치듯이 분비(pulsatile secretion)된다. 밤에 많이 분비된다고 알려져 있기에 잠을 늦게 자려는 어린 자녀에게 부모가 흔히 “키 크려면 일찍 자야지”라고 으름장을 놓곤 한다(자녀가 훗날 생물 수업을 들은 뒤 “밤을 새도 낮에 깊게 자면 성장 호르몬이 나와요”라고 대들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또 다른 특징은 성장 호르몬의 분비가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점이다. 예를 들면 비만인 사람의 수치는 낮은 반면에 음식 먹기를 꺼리는 신경성 거식증 환자의 수치는 높게 측정된다. 또한 앞서 살핀 것처럼 신체 운동을 하면 분비가 증가하며, 젊은 여성의 경우에는 생리 주기에 따라 변동이 나타난다.

수치가 널뛰기 하는 특성 때문에 성장 호르몬 도핑을 밝히는 작업은 오랫동안 난항을 겼었다. 운동선수의 몸에서 수치가 높게 측정되어도 외부에서 들어온 것인지 내부에서 분비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용을 금지한 지 무려 15년이 지난 2004년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아테네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성장 호르몬 검사를 도입할 수 있었다.

타이밍이 중요한 성장호르몬 도핑 검사

“우리 모두 걸리지 않는다고 알았거나 그렇게 생각했죠.”[3]

2009년 11월 영국의 럭비 선수 테리 뉴튼(Terry Newton)이 약물 검사에서 성장 호르몬 양성 반응을 보였다. 성장 호르몬 검사를 도입한 뒤 처음으로 적발된 사례였다. 다음해 2월 그는 부상의 회복을 위해 사용했다고 고백하며 2년의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자기 외에도 많은 럭비 선수들이 성장 호르몬을 사용 중이며 다들 검사에 걸리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왜 걸렸을까?

뛰어난 기량의 후커(hooker; 라인 아웃 시 공을 안으로 던지거나(스로인) 스크럼(각 팀에서 8명의 선수들이 어깨를 맞대고 공을 획득하기 위해 서로 엇갈리도록 대형을 만드는 것)시 맨앞 가운데에 서는 선수)였지만 성장 호르몬 도핑에 처음 적발된 선수라는 불명예를 갖게 된 테리 뉴튼. 유튜브 갈무리(https://www.youtube.com/watch?v=iuDpnV0nFQ0)
뉴튼의 도핑 혐의를 입증한 방법은 ‘동위체(isoform) 검사’였다. 체내에서 유전자가 단백질을 만들 때 구조가 약간씩 다른 변종이 생겨나는데, 이를 동위체라 부른다. 191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단백질인 성장 호르몬 역시 여러 동위체를 갖고 있다. 그 중 가장 주된 것은 22kDa(킬로달톤; 달톤(Dalton)은 분자량의 단위로, 1달톤은 수소원자 1개의 질량을 뜻함) 동위체이다. 또한 여러 형태의 소수 동위체가 존재하는데, 그 중 가장 흔한 것은 20kDa 동위체로 22kDa 동위체의 약 10퍼센트를 차지한다.

반면에 몸 바깥에서 들어오는 성장 호르몬은 전부 22kDa 동위체이다. 과거에는 사체(死體)의 뇌에서 채취한 성장 호르몬을 사용했지만, 크로이츠펠트-야콥병Creutzfeldt-Jakob disease; CJD) 전파의 통로가 되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1985년 의료 시장에서 퇴출되었다.[4] 이후 의료 영역에서는 실험실에서 합성한 성장 호르몬을 사용하고 있다. 유전자 재조합 기술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딱 한가지 동위체만 존재한다.

우리 몸에서 성장 호르몬의 분비는 여타의 호르몬들처럼 되먹임(feeaback) 기전을 통해 조절된다. 즉 체내에서 많아지면 뇌로 신호를 보내 성장 호르몬의 분비가 감소하고, 부족해지면 반대로 분비가 증가한다. 운동선수가 경기력 향상 목적으로 성장 호르몬을 투입하면 22kDa 동위체가 증가하고, 음성의 되먹임이 작동해 뇌하수체에서 성장 호르몬 분비가 감소한다.[5] 결과적으로 22kDa가 아닌 동위체는 감소하는데, 이를 측정하는 방법이 바로 동위체 검사이다.

외부에서 성장 호르몬을 투여하면, 22kDa 동위체 농도가 증가했다가 서서히 감소한다(검은 점). 이 때 음성 되먹임이 작동해 20kDa 동위체 농도는 감소한 뒤 낮게 유지된다(하얀 점). 미국 생리학-내분비학 및 신진대사 학회지 제공
동위체 검사의 정확성은 높지만 한 가지 약점이 있다. 성장 호르몬의 반감기(半減期; 체내에 들어온 약물의 양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 필요한 시간)가 짧아 12~24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분비 양상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도핑을 입증할 수 있는 기간 역시 짧다. 보통 도핑 검사는 경기가 끝난 뒤에 시행되므로 성장 호르몬을 계속 사용했어도 경기 며칠 전만 조심하면 검사에 걸리지 않게 된다. 즉 검출 기간이 짧은 동위체 검사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알고 있다면, 아킬레스건을 튼튼하게 해줄 성장 호르몬 주사 사용을 염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동위체 검사의 약점을 알고 있던 세계반도핑기구(WADA)는 2012년 영국 올림픽과 장애인 올림픽에 ‘생체지표(biomarker) 검사’를 추가 도입했다. 이 검사는 외부에서 투여한 성장 호르몬의 양에 따라 체내에서 증가하는 인슐린유사성장인자-1(IGF-1; Insulin-like Growth Factor)와 PⅢNP(Procollagen Ⅲ N-Terminal Propeptide)라는 물질을 측정하는 방법이다.[6] 검출 기간은 성장 호르몬 사용을 멈춘 뒤 2주까지 가능해서 동위체 검사의 부족한 측면을 채울 수 있었다.

도입 시기는 더 늦었지만 생체지표 검사는 사실 동위체 검사보다 더 일찍 개발된 방법이다. 그런데도 정식 도입이 늦어진 것은 개인별로 편차가 크고, 검출 수치의 표준화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영국 장애인 올림픽에서 두 명의 러시아 역도 선수의 성장 호르몬 사용을 적발하고도 생체지표 검사의 도입은 현재 잠정 보류된 상태이다. 성장 호르몬 도핑 잡기, 참 어렵다.

스탤론의 독백 “람보 하기 힘들어요”

노년에도 액션 배우 역할에 충실한 실베스터 스탤론. 사진은 젊은 시절에 촬영한 영화 <록키>의 한 장면. 유튜브 갈무리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은 ‘록키’와 ‘람보’로 1980년대 영화계를 주름잡은 액션 배우이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는 법. 1988년 <람보3>, 1990년 <록키5>를 끝으로 더 이상의 록키와 람보는 없었다. 그가 1946년생인 것을 감안하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런데 2006년 오랜 공백을 깨고 돌아온 <록키 발보아>는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고, 그는 여전히 팽팽한 근육을 선보이며 <람보4: 라스트 블러드>의 촬영에 들어갔다.

2007년 스탤론은 타이에서의 촬영을 앞두고 <록키 발보아>의 홍보를 위해 호주 시드니에 들렸다. 하지만 공항 세관원은 가방에서 성장 호르몬 주사액 병 48개를 발견했고, 적법한 처방전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몇 시간 동안 구금했다. 입국시 작성한 서류와 실제 품목이 달랐던 것이 원인이었다. 몇 달 뒤 그는 이렇게 항변했다.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뇌하수체가 느려지고, 늙었다고 느껴지고, 뼈가 부족해지죠. 이것(성장 호르몬)은 힘을 북돋아주고, 젊어 보이게 하죠. 당신도 젊어졌다고 느끼고요. 람보 하기 힘들어요 (Doing Rambo is hard work).”[7]

소싯적 모습을 되찾기 위해 평생 몸을 단련했던 스탤론이 성장 호르몬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최근에는 “청춘을 돌려다오”하며 노화 방지 병원을 찾는 노인들이 많다. 분비량이 스무살 전후에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이후 10년마다 약 14퍼센트씩 감소하는 특성을 감안하면, 줄어든 성장 호르몬을 다시 공급해서 노화를 방지하는 접근은 이치에 맞아 보인다. 정말 성장 호르몬은 ‘청춘의 샘’일까?

성장 호르몬을 이용한 항노화(anti-aging) 치료의 역사를 살펴보면 1990년에 발표된 소규모 연구 결과가 시발점이었다. 동년배들보다 성장 호르몬 수치가 낮은 6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일주일에 세 번씩 6개월 동안 성장 호르몬을 주사했더니 제지방체중(다른 말로 하면 근육)이 4.7킬로그램 늘었고, 지방은 3.5킬로그램 감소했다.[8] 연구진은 논문에서 항노화란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근육과 지방의 변화가 10~20년의 노화로 인한 변화와 동일한 규모이다"라고 언급했다. 세간의 관심이 이 문장에 쏠리면서 키 작은 자녀를 둔 부모나 관심 갖던 성장 호르몬은 갑자기 유명 약물이 되었다.

이후 통신 판매 업자나 배경이 의심스러운 항노화 치료 병원들은 이 논문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다. 결국 논문을 실었던 <뉴잉글랜드의학지(NEJM)> 측은 2003년 강한 어조의 사설을 통해 성장 호르몬을 항노화 치료에 사용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9] 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였다. 시장의 열기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몇 년 뒤 람보 하기 힘들어하던 스탤론도 흐름에 동참했다.

하지만 높은 인기와는 별개로 의학계는 아직까지 성장 호르몬의 노화 방지 효과에 부정적이다.[10] 아울러 정상 수치보다 높은 성장 호르몬은 몸이 붓는 부종, 관절의 통증, 당뇨 발병의 증가, 심장 기능의 약화, 두통 등의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 통념과 달리 성장 호르몬은 불로초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늙어가는 것을 막고 싶다면 교과서적이지만 뻔한 소리 - 잘 먹고, 자주 운동하고, 푹 자고, 술/담배 끊으세요 - 에 귀를 기울이시라.

외줄타기 같은 성장 호르몬 처방의 유혹

1956년 사람의 뇌하수체에서 처음으로 추출된 성장 호르몬은 이후 시대에 따라 여러 목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땅꼬마 아이의 키를 걱정하는 부모, 좋은 성적을 거두기 원하는 운동선수, 흘러가는 세월을 멈추고 싶어하는 노인에게 성장 호르몬은 장미빛 미래를 약속하는 마법의 주사였다. 정기적으로 주사를 맞는 번거로움이나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비싼 가격을 감내하면서 말이다.

불편한 상황에 사실은 의사들도 일조했다. 키도 경쟁력이라고 주장하는 부모들에게 부화뇌동하며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 어린이에게 주사를 놓고, 검출 기간이 길지 않다는 지식을 바탕으로 운동선수가 도핑 검사에 걸리지 않도록 돕고, 의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항노화 효과를 노인들에게 권유하는 식으로 말이다.

처음 성장 호르몬 도핑을 접했을 때는 운동선수와 지도자가 요리저리 피해 가는 미꾸라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깊이 알아갈수록 오히려 의사들이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 호르몬을 처방하는 의사는 아니지만 내게도 혹시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을 뿐’이라고 합리화하거나 합법과 불법 혹은 의학과 비의학의 경계에서 외줄타기 하고 있는 모습은 없는지 뒤돌아 본다. 성장 호르몬을 살펴보면서 뜻하지 않게 나의 내면 세계가 성장한 듯싶다.

1. 최재성, 김현철 주치의가 들려주는 2006년 비화. 스포츠조선, 2009.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01/2009030100121.html.

2. Armanini, D., et al., Growth hormone and insulin-like growth factor I in a Sydney Olympic gold medallist. Br J Sports Med, 2002. 36(2): p. 148-9.

3. Press Association, I'm not the only drugs cheat in rugby league, says Terry Newton The Guardian, 2010. www.theguardian.com/sport/2010/may/30/terry-newton-hgh-league-drugs.

4. 랜디 허터 엡스타인, 크레이지 호르몬. 동녘사이언스, 2019: p. 262-3.

5. Leung, K.C., et al., Physiological and pharmacological regulation of 20-kDa growth hormone. Am J Physiol Endocrinol Metab, 2002. 283(4): p. E836-43.

6. Longobardi, S., et al., Growth hormone (GH) effects on bone and collagen turnover in healthy adults and its potential as a marker of GH abuse in sports: a double blind, placebo-controlled study. The GH-2000 Study Group. J Clin Endocrinol Metab, 2000. 85(4): p. 1505-12.

7. Staff and agencies, Stallone guilty of importing growth hormone into Australia. The Guardian, 2007. www.theguardian.com/world/2007/may/21/australia.film.

8. Rudman, D., et al., Effects of human growth hormone in men over 60 years old. N Engl J Med, 1990. 323(1): p. 1-6.

9. Vance, M.L., Can growth hormone prevent aging? N Engl J Med, 2003. 348(9): p. 779-80.

10. Bartke, A., Growth Hormone and Aging: Updated Review. World J Mens Health, 2019. 37(1): p.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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