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은 “목(牧)이 민(民)을 위해 있는가, 민이 목을 위해 태어났는가”라고 묻고, “목이 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민이 목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라고 규정한다. 목민관 선출과 헌법 개정을 앞둔 올해 <목민심서> 200주년은 이 책이 제기한 ‘민’과 ‘국가’의 관계를 시대에 맞게 새롭게 정립해야 할 시점이다.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올해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완성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다. 목민관에 해당하는 지방 공직자 선거와 백성의 권리를 새롭게 규정할 헌법 개정을 앞둔 시기에 200주년을 맞게 되어 그 의미가 새롭다. 1800년 6월 정조가 돌아가자 천주교 연루 혐의를 받은 다산은 1801년부터 18년간 장기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1818년 봄 <목민심서>가 완성된 후 이해 8월 유배에서 풀려, 9월 중순 고향 마현리 여유당으로 돌아왔다. 나이 쉰일곱이었다. 다산은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가 돌아간 해에 태어났다. 16살 때 성호 이익을 읽고 사숙한 그는 22살에 성균관에 들어가 초시·회시를 거쳐 정조(1776~1800)를 알현했고, 28살 때 전시(殿試)에 수석 합격했다. 이해 그는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돼 정조의 탕평노선을 뒷받침하는 엘리트군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경학과 시문·시무에 밝은 다산은 규장각 각신으로 승정원과 삼사에 봉사하며 왕을 보필했다. 34살에 통정대부에 오르고 채제공과 함께 정조의 화성 사역에 공헌했다. 다산은 왕의 측근으로 정조의 ‘목민적’ 삶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정조는 왕실에서 비단을 추방하고 스스로 베옷을 입었으며, 음식은 하루 두 끼를 먹고 반찬은 두서너 가지에 그쳤다. 임금이 거처하는 편전에 비가 샐 때도 많았지만 수리하지 않아 그 소박한 모습에 신하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정조평전: 성군의 길>, 한영우) 민초를 보육하는 일이 ‘목민’이라면, 정조가 보여준 목민적 삶은 수령과 방백 등 목민관에도 준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정조의 삶에서 다산은 백성을 보양하는 ‘목민’이야말로 국가 경영의 요체임을 터득하고 <목민심서>를 구상했을 법하다. <목민심서> 저술은 그의 부친 정재원이 다섯 곳에서 역임한 목민 사역과 그 자신의 목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적 산물이었다. 서문에는 부친의 목민 치적을 언급하면서 “소자는 비록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좇아 배워서 다소간 들은 바가 있었고, 보아서 다소간 깨달은 바도 있었으며, 물러나 이를 시험해봄으로써 다소간 체득한 바가 있었다”고 썼다. 부친의 목민 경험이 이 책 저술에 동기를 부여했다는 뜻이다. 다산은 33살에 홍문관 수찬 직에서 ‘경기 암행어사’로 임명받았는데, 이 경험은 목민 실태 파악에 큰 도움을 주었으나, 그때 좌고우면하지 않고 올린 경기감사 서영보에 대한 고발장은 뒷날 그의 유배생활을 옥죄었다. 그 뒤 금정 찰방으로 잠시 떠났다가, 36살 때 곡산 부사로 부임해 1년 반 동안 목민관으로 재직하면서 황해도 목민관들을 염찰하라는 명령도 받게 되었다. 이런 경험들이 고스란히 <목민심서>에 녹아 있다. <목민심서>는 무엇보다 다산이 18년간 유배생활하면서 남긴 인고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배생활은 “처지가 낮아졌기 때문에 (민초로부터) 듣는 것이 매우 상세하여” 관직에서 체험할 수 없었던 백성들의 삶을 접할 수 있었다. 다산은 유배생활 중에 견문한 민중의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을 <목민심서>에 삽화처럼 그렸다. 강진 유배지에서 쓴 시 ‘애절양’(哀絶陽)이 대표적이다. 그가 말하는 시를 짓게 된 경위다. “이 시는 1803년 가을 내가 강진에서 지은 것이다. 그때 갈밭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보에 편입되고 이정(里正)이 못 바친 군포 대신 소를 빼앗아가자 그 백성이 칼을 뽑아 자기 성기를 스스로 베면서 ‘내가 이 물건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고 말하였다. 아내가 그 성기를 가지고 관아에 나아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졌고, 울며 호소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목민심서> 병전(兵典) 6조 첨정(簽丁)) ‘애절양’은 조선 후기 백골징포·황구첨정 등 군포 부정의 실태를 폭로한 실례로, 한 지식인의 민중 현실에 대한 처절한 증언이다. <목민심서>에 나타난 민본사상은 다산이 쓴 원목(原牧)과 탕론(蕩論)에 잘 나타나 있다. 다산은 “목(牧)이 민(民)을 위해 있는가, 민이 목을 위해 태어났는가”라고 묻고, “목이 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牧爲民有也)이지, 민이 목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라고 규정한다. 통치권력이란 것도 민중이 위로 추대하여 상향식으로 이뤄진 것이지, 위에서 하향식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며, 따라서 역사상 순역(順逆)에 대한 평가도 “목이 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산은 전제군주하에서도 민중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했다. 원목과 탕론은 다산이 곡산에서 부당과세에 대한 이계심의 집단항거를 무죄방면하여 ‘국민저항권’을 인정했던 그 시기쯤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했다.(<다산 정약용 평전>, 박석무) <목민심서>에 나타난 다산의 민본사상은 선대 실학자들의 학문적 전통을 잇고 자신이 경학 연구를 통해 터득한 산물이다. 반계의 행장을 쓴 오광운은 <반계수록>의 철학적 기초가 성리학 연구의 결과라고 하면서, 경학 연구가 경세학으로 연결되었다고 했다. 채제공은 성호 이익을 두고 그의 “학문은 문채를 떠나 실제에 충실하며(去文而務實), 예론은 사치를 버리고 검박을 따르며(棄奢而從儉), 경제는 위의 것을 덜어 아랫것에 더한다(損上而益下)”고 했다. 다산의 ‘부한 것을 덜어 가난함에 보탠다’(損富而益貧)는 경제관은 성호의 것과 다르지 않다. 실학 전통을 계승한 다산은 경학을 통해(修己) 경세에 이른(治人) 학문 탐구 과정도 반계, 성호와 비슷하다. 그는 ‘귀양살이 빈방에서 18년 동안 사서오경을 반복, 연구하여 수기의 학을 이뤘으나 그것은 학문의 절반에 불과하다’고 술회했다. 못다 한 ‘학문의 절반’은 무엇일까. 경세치인의 학이다. 이 경세학에 매진하면서 엮은 것이 <목민심서>를 비롯한 1표2서다. <목민심서>는 지방 행정에 임하는 목민관이 지녀야 할 인품과 경륜, 부임할 때부터 해관(解官)되고 돌아올 때까지 임지에서 행할 행정·사법상의 권한과 의무, 백성을 독려·위무·부양·훈육해야 할 실제 방안을 써놓았다. 특히 아전 다루는 방안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지방 행정을 책임진 목민관의 교과서다. 책은 12부72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맨 앞과 뒤에 부임과 해관에 관한 사항을, 중간에는 자기기율(律己), 공공봉사(奉公), 백성사랑(愛民)이라는 목민 원칙과 이, 호, 예, 병, 형, 공의 육전과 진황(賑荒)에 관한 구체적 사항을 열거했다. 각 조에는 목민관의 업무준칙과 모범적인 사례들을 제시했다. 다산은 목민관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공렴(公廉)을 강조했다. 후인들은 이 책을 ‘삼정문란의 해결책’, ‘당론을 떠나 목민관의 필독서’라 평가했다. 다산의 주변에는 그를 도와 수고한 제자들이 있었다. ‘다산 학단’이다. 이들은 다산의 계도에 따라 경서는 물론 중국·조선의 사서 및 여러 문집들을 읽고 사례를 찾아내 분류, 정리하고 깨끗하게 필사했다. 다산이 이를 최종적으로 정리, 편집하여 한 체제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목민심서>는 ‘다산 학단’의 협동의 산물이었다. <목민심서>는 군주제하에서도 나라의 기본인 ‘민’과 ‘국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고민을 담았다. 1985년 다산연구회가 다산 서거 150년을 맞아 목민심서를 완역, 출판하면서 쓴 서문은 문제의 핵심을 이렇게 짚었다. “다산은 ‘민’의 주체성을 긍정하여 ‘민’의 자율적 참정과 의사의 반영으로 체제를 갖추는 것이 원리에 합당한 것으로 보았고”, “그 바탕에서 ‘민’과 ‘국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했다”. 목민관 선출과 헌법 개정을 앞둔 올해 <목민심서> 200주년은 이 책이 제기한 ‘민’과 ‘국가’의 관계를 시대에 맞게 새롭게 정립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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