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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15 05:01 수정 : 2018.05.15 16:12

평화원정대-희망에서 널문까지
④ 우간다 거주 남수단 난민의 생존기

수단 내전 중 태어난 니알리스
반복되는 전쟁에 결국 국경 넘어
종전 없이 ‘서류뿐인 정전협정’
잔인한 ‘희망고문’에 귀향 포기

남편 잃고 정부군에 잡힌 니아코
비인격적 대우에 집단 성폭행까지
탈출뒤 닷새간 걸어 겨우 우간다에
42살 믿기지 않는 얼굴엔 주름만…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야구팬에겐 막판 역전승의 환희로 다가오는 이 말은 거듭되는 전쟁의 피해자들에겐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절체절명의 기도문이다. 서로에게 방아쇠를 당기던 양쪽 당사자가 만나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종전을 선언하고 총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기 전까지 전쟁은 끝난 게 아니다. 휴전은 평화로 가는 징검다리일 수도 있지만, 전쟁으로 되돌아가는 끔찍한 미끄럼틀일 수도 있다. 전쟁 속에 태어나 살다 그새 새로운 전쟁 때문에 결국 난민 신세가 돼버린 남수단 여성들에겐 후자에 해당할 터이다.

메리 니알리스(38)를 만나기 위해 평화원정대는 지난 11일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서 북쪽을 향해 자동차로 4시간 동안 달렸다. 키리안동고 난민촌 입구를 지나자 수도꼭지를 향해 가지런히 줄지어 선 수백개의 물통이 취재진을 맞았다. 맨발의 아이들은 허물어져가는 흙집을 배경으로 먼지를 날리며 뛰어놀았다. 전체 135만명에 이르는 우간다 거주 남수단 난민 가운데 11만여명이 이곳에 머무른다. 유엔에 등록하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15만여명에 이를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지난 11일 오후(현지시각) 우간다 키리안동고에 있는 남수단 난민촌에서 난민들이 물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키리안동고/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2013년 12월15일 남수단 수도 주바의 대통령궁에서 총격전만 벌어지지 않았어도, 니알리스는 지금 남의 나라 난민촌이 아니라 남편과 함께 살던 남수단 북쪽 나시르의 고향집에 있을지 모른다. 그날 살바 키르 대통령의 경호원과 리에크 마차르 부통령의 경호원 사이에 일어난 총격전으로 26명이 숨졌다. 키르 대통령이 대표하는 딩카족 군대와 경찰이 마차르 부통령이 상징하는 누에르족의 지역에서 살육에 나섰다. 니알리스 가족은 살기 위해 주바로 갔다.

“주바에서 누에르족 사람이 우리를 숨겨줬는데 정부군이 쳐들어왔어요. 그러곤 남편과 그의 친동생 둘, 그리고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총으로 쏴 죽였어요. 나는 침대 밑에 5살짜리 막내아들과 숨어 죽음을 면했어요. 나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는데, 아들이 ‘엄마, 죽지 마’라며 매달렸어요.” 니알리스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으나, 참극을 입에 올리기가 쉽지 않은지 취재진과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지난 11일 오후(현지시각) 우간다 키리안동고에 있는 남수단 난민촌에서 메리 니알리스(왼쪽)가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니알리스는 남수단 내전 상황에서 남편과 4명의 아이를 잃었고, 5살 아이와 남수단을 탈출해 난민촌에서 친자식 2명과 고아 11명을 키우고 있다. 키리안동고/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다음날 그는 다른 누에르족 사람의 차를 얻어 타고 우간다와의 국경 검문소가 있는 니뮬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우간다 병사들이 비자도 없는 이들 모자를 통과시켜줬다. 니알리스는 천신만고 끝에 난민촌에 도착해 유엔에 난민 등록을 하다 친오빠와 언니의 자식 12명을 우연히 만났다. 조카들과 부둥켜안고 우는데, 오빠와 언니는 보이지 않았다. 탈출 과정에서 둘 다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그의 인생에서 희망을 품은 때가 없지는 않았다. 니알리스는 앞서 250만명이 숨진 수단 내전 기간 중 태어나 2011년 7월 남수단이 수단에서 분리해 독립에 성공했을 때만 해도 드디어 평화가 오는가 싶었다. 하지만 채 3년도 지나지 않아, 한때 독립운동 동지였던 두 지도자의 무력충돌로 난민이 되고 말았다. 니알리스는 세상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감추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도 나시르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또 전쟁 나면 빨리 피난 가야 하잖아요. 우간다 쪽 국경 근처에서 살아야 할까요? 남수단 국경을 넘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니알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는 ‘희망 고문’을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내전이 발발한 이후 남수단은 ‘정전’과 ‘종전’ 사이가 얼마나 멀고 아득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남수단 정부와 반군 세력은 니알리스가 난민촌에 온 2014년 1월 첫 정전협정을 맺었으나 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그해 5월과 8월, 2015년 8월에 이르기까지 양쪽은 정전협정을 되풀이했다. 서류로 되풀이되는 정전협정은 중단되지 않는 전쟁에 대한 잔인한 농담이었다. 두 적대세력은 평화로 나아갈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는 데 매번 실패했고, 그럴 의지도 없어 보였다. 그다음은 다시 총질이었다.

결국 2016년 7월 정부군과 반군이 다시 대규모 충돌을 일으키며 남수단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살바 키르와 리에크 마차르는) 서로 맞붙고 있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통제하라”고 권고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남수단 북쪽 벤티우 지역에서 철물 보따리상을 하던 남편과 살며 농사를 짓던 마사 니아코가 모든 것을 잃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11일 오후(현지시각) 우간다 키리안동고의 남수단 난민촌에서 한겨레평화원정대와 만난 마사 니아코. 마흔두살이라고 나이를 밝힌 니아코는 난민촌으로 오기 전에 남편을 잃고, 세차례 죽을 위기를 넘겼으며, 군인들에게 집단강간까지 당했다고 했다. 2013년 12월부터 내전 상태에 빠진 남수단에서는 정전협정 체결과 전투 재개가 되풀이되고 있다. 니아코를 비롯해 남수단 난민에게 가장 절실한 평화의 길은 ‘종전’이다. 키리안동고/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교전이 격화하자 그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유전채굴 회사로 도망갔다. 그곳은 유엔군이 외곽 경비를 하고 있어서 안전했다. 일주일 뒤, 그는 남편이 맹장염으로 입원해 있던 병원을 찾았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의료진은 다 도망가고 남편과 다른 환자는 이미 숨진 뒤였다. 키리안동고 난민촌 한쪽에 있는 허름한 학교 건물에서 평화원정대와 마주 앉은 니아코는 42살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이 들어 보였다. “당시 병원에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잔뜩 주름이 졌다.

니아코는 아들 넷과 함께 어렵사리 주바에 도착했으나 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부군은 가족을 붙잡아 가둔 뒤 인육을 먹으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이를 거부하자 군인 세 명이 그를 번갈아가며 성폭행했다. 하혈과 구토가 이어지는 고통 속에서 그는 아이들과 함께 다른 정부군에 인계됐다. 다행히 젊은 딩카족 병사가 풀어줘 숲속을 닷새간 걸어 우간다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난민촌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모든 것의 부족’이었다. 식량은 유엔이 한달에 5㎏씩 주는 수수 혹은 콩이 전부다. 학교라곤 난민촌 안에 초등학교 5곳, 중등학교 한곳뿐이어서 아이들 교육을 꿈꾸기도 어렵다. 평화원정대를 만난 다른 난민들은 그나마 하나 있는 병원에 약이 충분치 않다고 전했다. 난민은 난민촌 인근 우간다 상점 등에 비공식 취업을 할 수 있으나, 형편없는 저임금에 시달린다. 세탁소나 식당 등에서 온종일 일해도 2000우간다실링(약 575원)밖에 받지 못한다고 난민들은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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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가난에서도 십시일반…서로가 버팀목인 ‘산두크’

11일 오후(현지시각) 우간다 키리안동고에 있는 남수단 난민촌의 기독교 교회에서 난민 어린이들이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내용으로 율동 연습을 하고 있다. 이곳 난민촌에는 유엔에 등록된 난민 11만여명과 등록되지 않은 난민 3만여명이 살고 있다. 키리안동고/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수단 여성들 자조모임 ‘산두크’
매달 일정액 회비 ‘계’와 닮았지만
등록 회원 아니어도 어려움 살피고
긴급자금 지원하는 등 연대 강해

“유엔은 한달에 식량 5㎏만 주고 끝”
국제기구보다 가까운 희망 찾지만
태부족한 생필품·형편없는 임금…
‘정전협정에 갇힌 평화’에 고통 계속

국가뿐 아니라 국제기구에도 생존을 의탁할 수 없는 난민들은 서로의 가난을 모으는 길을 스스로 찾는다. 특히 여성들의 자조 모임이자 연대의 도구로 기능하는 ‘산두크’가 눈에 띈다. 20여명의 회원이 한달에 한번씩 모임을 열어 일정액을 회비로 걷는다. 최근엔 5000우간다실링(약 1440원)이다. 작으나마 목돈을 만들어 회원들에게 돌려주는 게 주요 목적이다. 산두크는 아랍 쪽 전통으로, 예전부터 수단 여성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 관습으로 알려졌다.

산두크는 한국의 ‘계’와 닮았다. 하지만 산두크는 계보다 연대성이 훨씬 강하다. 돈 탈 순서가 아니지만 형편이 어려운 회원이나 회원이 아니더라도 어려움에 처한 난민에게 과감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니알리스는 “우리 집에 조리용 석탄이 다 떨어져 사람들에게 얘기해서 긴급자금을 지원받은 적이 있다”며 “올해 초엔 산두크 회원이 아닌 여성이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는데 병원비가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고 130만우간다실링을 지원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wlsks 11일 오후(현지시각) 우간다 키리안동고의 남수단 난민촌에서 난민들의 자조 모임인 산두크 회원들이 모여서 자수를 놓고 있다. 키리안동고/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니알리스와 다른 산두크에 속해 있는 니아코는 요즘 벌이가 시원찮아 그나마 회비를 석달째 못 내고 있다면서도 산두크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산두크가 제대로 기능하면 유엔보다 훨씬 낫다고 봐요. 왜냐면 유엔은 한달에 식량 5㎏ 주고 끝이지만 산두크는 비상상황에 처한 회원이 얘기하면 회의를 열어 도와주거든요. 저도 지난 1월에 식량이 떨어져 옥수수를 산두크에서 지원받았어요. 또 유엔은 등록한 난민만 도와주는 반면, 산두크는 회원이 아니더라도 도와줘요.”

벽돌로 얼기설기 만들었어도 그나마 아늑해 평화원정대가 인터뷰 장소로 활용한 벽돌 건물도 산두크가 모은 돈으로 지었다고 말하는 산두크 회원들의 얼굴에서 자부심이 묻어났다. 타비자라는 이름의 여성이 원정대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산두크에서 이렇게 천에 수를 놓은 물건을 팔아 돈을 보태고 있어요. 그 돈으로 형편을 가리지 않고 아이들 학비도 지원해줘요. 남수단 국경에서 사람들이 넘어오려 할 때도 산두크가 도와주지요.”

그럼에도 현실은 버겁기만 하다.

“우리는 가까스로 전쟁에서 죽음을 모면했어요. 하지만 우리를 보세요. 이렇게 기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우리가 고통받고 있다는 걸 꼭 좀 알려주세요.”

이들의 희망은 평화에 있지만, 지금 이곳의 평화는 정전협정에 갇혀 있다.

키리안동고/전종휘 유덕관 기자 symbio@hani.co.kr

평화원정대가 우간다 키리안동고에 있는 남수단 난민촌에서 만난 메리 니알리스가 자신이 생각하는 평화의 의미를 담은 ‘한 장의 평화’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니알리스는 누에르족 언어로 건강을 뜻하는 ‘푸알’(Pual)을 평화의 뜻으로 풀었다. 키리안동고/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평화원정대가 우간다 진자에 있는 키마사 초등학교에서 만난 나무가야 캐서린이 자신이 생각하는 평화의 의미를 담은 ‘한 장의 평화’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캐서린은 루소가 언어로 교육을 뜻하는 ‘오쿠소마’(Okusoma)를 평화의 뜻으로 풀었다. 진자/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평화원정대가 우간다 진자에 있는 키마사 초등학교에서 만난 아라시 앤젤라가 자신이 생각하는 평화의 의미를 담은 ‘한 장의 평화’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앤젤라는 루소가 언어로 권리를 뜻하는 ‘에뎀베’(Edembe)를 평화의 뜻으로 풀었다. 진자/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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