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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오전(현지시각) 르완다 키갈리 제노사이드 기념관에 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키갈리 제노사이드 기념관에는 희생자 25만여명이 묻혀 있다. 키갈리/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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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원정대-희망에서 널문까지
⑤르완다 제노사이드 24년
부모 잃은 투치족 은시지롱구
학살 기억 뚜렷…아직도 악몽
동네서 가끔 가해자 만나지만
이젠 후투·투치 구분하지 않아
24년전 학살 빚어진 석 달
“잊지 말자” 국가애도기간
매해 4월 제노사이드 기념관
가족 잃은 시민들 눈물 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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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오전(현지시각) 르완다 키갈리 제노사이드 기념관에 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키갈리 제노사이드 기념관에는 희생자 25만여명이 묻혀 있다. 키갈리/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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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목을 향해 마체테가 겨누어졌다. 칼날이 길고 넓은 아프리카의 칼, 마체테 손잡이를 꽉 움켜쥔 이는 낯이 익은 동네 주민이었다. 아빠를 죽인 자들의 흉기가 이틀 만에 다시 춤을 췄다. 엄마가 맥없이 쓰러졌다. 일곱살 은시지룽구의 어린 눈에 날아와 박힌 끔찍한 장면은 24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하다.
서른한살 어른이 된 꼬마는 지금도 이웃들이 아빠와 엄마를 죽인 합리적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오로지 투치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의 대상이 됐다는 걸 너무나 잘 알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어른들은 종족이 다르다는 아주 작은 차이로 서로를 구분했다. 그러곤 그 틈바구니에서 증오라는 이름의 괴물을 길러냈다. 끝내 그 괴물이 죄 없는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그 사람들은 누구네 집이 후투이고 누구네 집이 투치인지 정확하게 알았어요. 제노사이드(집단학살) 전부터 리스트를 만들었죠. 언제 누구를 죽일지 미리 다 결정이 돼 있었더라고요. 1994년 4월17일 아빠를 죽이고 이틀 뒤 엄마를 죽이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봤어요. 100살이 돼도 못 잊을 거예요.”
지난 15일 르완다 수도 키갈리의 한 변두리 지역에 있는 집에서 만난 빈센트 은시지룽구가 마치 악몽을 꾼 사람의 얼굴로 말했다. 그에게 24년 전 살벌한 기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둘째를 임신한 부인과 두살짜리 아들이 그의 주변을 서성였다. 불안은 전염된다.
다수족인 후투와 소수족인 투치가 오래전부터 서로 증오한 건 아니다. 서양에서 온 백인 제국주의자들이 조장했다. 투치왕족이 지배하던 이곳을 1895년 독일이 접수했으나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1916년 벨기에가 점령했다. 벨기에는 1932년 이 땅에 신분증 제도를 도입하며 겉면에 각 종족을 표기하도록 했다. 그리고 인구의 15%가량에 불과한 투치족이 서양인과 조금 더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우생학을 들먹이며 후투보다 우월한 종족이라고 선전했고, 그들을 이용해 르완다를 통치했다. 전형적인 분할지배 전략이다. 1959년 후투족이 투치왕조를 무너뜨린 뒤 투치족에 대한 억압이 시작됐다. 후투와 투치 간 내전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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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전(현지시각) 르완다 키갈리에서 빈센트 은시지룽구가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빈센트의 부모님은 제노사이드 당시 숨졌다. 키갈리/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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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6일, 후투 출신 대통령 쥐베날 하비아리마나가 탄 비행기가 키갈리 인근에서 격추되면서 학살극이 시작됐다. 다음날부터 인테라하므웨라 불리는 후투족 의용군 전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투치와 온건파 후투 살육에 나섰다. 하지만 은시지룽구 말대로, 살육에 대한 준비는 인테라하므웨가 몇달 전부터 차근차근 진행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경기도와 강원도를 합한 것보다도 조금 작은 면적의 이 나라에서 무려 100만명에 이르는 투치와 온건 후투가 불과 100여일 만에 죽임을 당했다. 하루 1만명꼴이다. 부모에 이어 죽을 위기에 있던 은시지룽구가 4월23일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도망갈 수 있었던 건 “치마를 입어 여자아이인 척하라”고 한 누나의 기지 덕분이다. 당시 주요 표적은 투치족 어른과 남자아이들이었다. 패기로 똘똘 뭉친 투치 전사들의 군대, 르완다애국전선(RPF)이 우간다에서 키갈리까지 신속하게 치고 들어와 싸우지 않았더라면 그의 삶도 그때 끝났을 수 있다. 유일한 혈육이던 네살 위 누나와 함께 도망치던 은시지룽구는 난리 통에 결국 누나와도 헤어지게 됐다.
“그때 우기라서 비가 많이 왔어요. 남의 수수밭에 혼자 숨어서 감자, 고구마, 옥수수를 몰래 먹고 버텼어요. 한달 넘게 동물처럼 살았죠. 누나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 기억은 지금도 은시지룽구에게 또렷하기만 하다. 7월4일 르완다애국전선이 인테라하므웨를 완전히 내쫓고 르완다를 접수하던 즈음 돌아온 그의 동네는 집들도 다 무너져 그야말로 폐허였다. 동네 사람 700명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뒤였다.
제노사이드 이후 은시지룽구의 삶은 크게 바뀌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은시지룽구는 누나와 함께 외할아버지 동생 집에 얹혀살았다.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를 반복하다 21살이 돼서야 가까스로 졸업했다. 중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집 근처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는 은시지룽구의 한달 수입은 현재 5만르완다프랑(약 6만2500원)에 불과하다.
식민통치한 제국주의 국가
후투-투치 ‘분할지배’ 전략
종족간 갈등, 학살극 비화
1994년 100만명이 죽임 당해
“제노사이드가 아니었으면 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이에요. 지금의 제 삶이 그다지 자랑스럽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요. 우리 아들 내년 2월에 유치원 보내야 하는데, 한달 유치원비가 3만프랑이나 한대요.”
은시지룽구의 아빠는 제노사이드 이전 집 근처에 있는 한 독일 방송사의 경비를 서던 군인이었다. 그도 아빠의 뒤를 따라 군인이 되는 꿈을 키웠다. 그의 꿈을 무너뜨리고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은 주술이나 다름없었다. 후투와 투치라는 근거 없는 우열의 구분 짓기와 이를 토대로 한 증오. “지도자들이 제대로 된 마음을 가졌다면 제노사이드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학교에서 증오를 가르쳤어요. ‘후투가 더 나은 종족이다’라고 말이에요.” 당시 투치족이란 이유만으로 아이들이 학교에서 쫓겨나던 게 다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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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오후(현지시각) 르완다 루항고 제노사이드 기념관에서 이 지역 학생들이 추모 행사를 하고 있다. 루항고 제노사이드 기념관에는 희생자 2만여명이 묻혀 있다. 르완다에서는 1994년 대학살이 벌어진 기간인 4월7일부터 7월15일까지를 추모 기간으로 정해 학교별로 지역 제노사이드 기념관에서 추모 행사를 연다. 루항고/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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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언덕’ 불린 르완다, ‘천 개의 슬픔’ 묻어나다
‘천개의 언덕’. 예부터 크고 작은 언덕이 많은 르완다는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렸다. 수도 키갈리는 물론이고 지방 어딜 가나 널찍한 평지를 찾기 어렵다. 지난 16일 키갈리에서 남쪽으로 차로 2시간 거리의 후예시 키나지 지역에서 만난 은다이사바 필리프(56)는 은시지룽구와는 달리 사건 당시 어른이었다. 하지만 그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을 뿐 달리 손쓸 도리가 없었다. 그는 마치 가슴속에 ‘천개의 분노’와 ‘천개의 슬픔’을 간직한 것처럼 보였다.
필리프은 24년 전 사랑하는 가족 모두를 제노사이드에 희생당했다. 4월20일부터 시작된 인테라하므웨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투치족 사람들은 키나지에서 멀지 않은 송가 지역으로 집결했다. 필리프도 아내와 13살, 9살짜리 딸, 5살짜리 아들의 손을 잡고 그곳으로 내달렸다. 투치 1만5천명은 일주일간 장렬히 맞섰다. 마침내 후투족 군대가 들이닥쳤다. 살육이 시작됐다. 단 100여명의 투치만 간신히 숲속으로 도망쳤다. 군인과 군견의 추격을 뿌리치고 간신히 이웃나라 부룬디 국경을 넘어 목숨을 건진 이 가운데 필리프도 끼어 있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이었어요. 혼자 뛸 수밖에 없었죠. 아내와 세 아이를 챙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필리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눈동자는 초점을 맞출 곳을 찾지 못했다. 그에게 “그래도 당신 가족인데, 챙겼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차마 하지 못했다.
다시 국경을 넘어 한달 뒤 돌아온 마을에서 그는 아내와 세 아이는 물론이고 자신의 부모와 형제들도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자기 혼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운이 좋아서였다. 24년이 지나도록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더 옅어지지도, 단단해지지도 않고 끊임없이 되뇌어질 뿐이다.
24년 전 학살 빚어진 석 달
“잊지 말자” 국가애도기간
매년 4월 제노사이드 기념관
가족 잃은 시민들 눈물 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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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항고 고등학교 학생들이 16일 오후(현지시각) 제노사이드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르완다 루항고에서 제노사이드 기념관으로 향하고 있다. 루항고 제노사이드 기념관에는 희생자 2만여명이 묻혀 있다. 제노사이드가 시작된 4월 7일부터 7월 15일까지 추모기긴에 학교별로 지역 제노사이드 기념관에서 추모행사를 연다. 루항고/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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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송가에는 제노사이드 기념관이 들어섰다. 일일이 주검을 확인하지 못한 탓에 가족이 그곳에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필리프는 매년 4월28일 기념관에 들러 묵념을 한다. 같은 날 가족을 잃은 1만5천가구의 생존자들도 꽃을 들고 이곳을 찾는다. 이 기간은 온 나라가 제노사이드 기념관이 된다. 학살이 벌어진 4월7일부터 7월4일까지는 국가적인 애도 기간이다. 사회 전체가 추념의 분위기에 빠진다.
평화원정대는 필리프를 만나고 키갈리로 돌아오는 길에 뙤약볕 속에서 흰색 셔츠에 감색 바지와 치마 교복 차림으로 루항고 제노사이드 기념관을 향해 걷는 고등학생 무리를 만났다. 한 학생은 원정대에 “3개 학년 800여명이 선생님과 함께 가는 중”이라며 “추도 기간에 하루 날을 정해 매년 이렇게 행사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기념관에 모여 20여분간 제노사이드에 관한 설명을 듣고 숨진 이들을 향해 묵념하는 등 경건하게 행사를 치렀다.
필리프는 제노사이드 이후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자신처럼 학살에서 살아남은 여성을 만났다. 둘 사이에 아이 여섯을 낳았다. 그는 소 10마리도 키운다. 이를 토대로 2012년 키나지낙농협동조합(KIDACO·키다코) 조합원이 됐다. 조합을 거쳐 동네에 생우유와 요구르트를 판다. 주업으로 술집을 운영하는 그는 조합에서 작으나마 부수입을 얻고 있다. 필리프는 앞으로 키다코가 더 큰 조합으로 성장해 주소득원이 되길 바란다.
필리프의 가해자들과 은시지룽구의 가해자들은 모두 사법부의 법정이 아니라 르완다판 ‘원님 재판’에 해당하는 ‘가차차’를 거쳐 벌을 받았다. 가차차는 마을회관이나 공터 같은 곳에서 마을의 어른이 주재하는 간이 재판으로, 르완다는 가차차를 거쳐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결정했다. 제노사이드 가담자들은 저지른 죄에 비해 가벼운 징역 15년 안팎의 처벌밖에 받지 않았다. 하지만 필리프와 은시지룽구는 제노사이드 가해자와 시간을 두고 화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납득하고 있었다. 이는 수많은 가해자를 모두 사형이나 중형에 처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또 다른 복수극이 반복될 수 있다는 사회적 논란을 우려해 르완다 사회가 선택한 결론이다.
“가차차에서 증언이 나왔어요. 그래서 누가 내 가족을 죽였는지 알게 됐어요. 지금 일부 가해자는 감옥에 있고, 일부는 형기를 마치고 나왔죠. 아쉽지만 가해자가 최고 15년 동안 감옥에 있어야 한다는 점에 만족해요. 중요한 건 사람을 죽인 후투가 그것으로 어떤 이득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정부가 젊은 세대에게 보여주는 것이죠.” 필리프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은시지룽구는 “지금도 동네 돌아다니다 가해자를 가끔 만난다”고 했다. 그럴 땐 어떤 심정이 될까? “우리마저 그들을 죽이려고 하면 우리도 그 사람들이랑 다를 게 없지 않으냐. 좋은 미래는 사람들이 화해를 함으로써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은시지룽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딘가 힘겨워 보였다.
금기어 된 후투냐, 투치냐…“평화란 구분도, 차별도 않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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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후(현지시각) 르완다 키나지 송가 제노사이드 기념관 묘지에 조화들이 놓여 있다. 이 지역에서만 4만7천명의 투치족이 희생됐다. 키나지/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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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차와 함께 제노사이드 이후 르완다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은 바로 ‘은두무니아 르완다’이다. 르완다의 공용어인 키냐르완다어로 “나는 르완다인이다”라는 뜻이다. 현재 르완다에선 “너는 후투냐, 투치냐”라는 질문은 일종의 금지어다. 이렇게 묻는 사람은 르완다 사회를 잘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이런 질문을 받는 르완다 사람 대부분은 “은두무니아 르완다”라고 대답한다.
제노사이드 이후 르완다 사회
종족 구분 행위 법으로 금지
어길 땐 최대 9년 징역형 처벌
희생자 폄훼 발언 부시장 체포
부모·형제 중 3명 잃은 앨버트
“투치랑 후투랑 서로 결혼하고
같은 학교·같은 병원에 다녀
남과 북, 르완다서 평화 배우길”
이는 르완다애국전선을 이끌고 학살을 종식시킨 폴 카가메 장군이 2000년 대통령에 오른 뒤 18년 동안 선거독재로 자리를 유지하면서 가장 공을 쏟은 부분이다. 더 이상 쓸모 없는 구분 짓기와 차별, 증오로 인한 갈등을 멈추고 르완다에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자는 것이다. 은시지룽구가 애써 ‘미래를 위한 화해’를 입에 올린 것도 이런 ‘사회적 이성’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르완다에선 어떠한 이유로든 종족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형법으로 금지돼 있다. 이를 위반해 ‘제노사이드 이데올로기’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는 행동을 한 사람에겐 5년에서 최대 9년의 징역을 선고할 수도 있다. 실제 지난 11일 니아비후시의 클라리스 무칸상가 부시장이 경찰에 체포됐다. 그녀는 전국적인 추모 기간이던 지난달 12일 지역의 제노사이드 추모 행사 때 희망을 상징하는 불이 켜진 촛불을 손으로 드는 행위를 거부하고 제노사이드 희생자를 폄훼하는 발언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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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현지시각) 르완다 후예시 키나지낙농협동조합(KIDAKO·키다코) 공장에서 한 직원이 원유를 살균하고 있다. 키다코는 대학살 참사 생존자들의 원활한 사회 복귀뿐 아니라 가해 종족인 후투족과도 자연스럽게 화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르완다 정부가 전국적으로 추진하는 협동조합 가운데 하나다. 후예/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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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가 어둑해질 무렵 은시지룽구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다 이 마을에서 유치원을 운영하는 앨버트 무사비이마나(40)와 마주쳤다. 무사비이마나도 제노사이드 때 부모와 6형제 가운데 셋을 잃었다고 했다. 그가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르완다에선 투치랑 후투랑 같은 학교, 같은 병원에 다니고 서로 결혼도 하죠. 더 이상 누가 후투다, 누가 투치다 구분하지 않아요. 평화와 희망은 함께 가는 거예요. 얼마 전 <시엔엔>(CNN)에서 남한 대통령과 북한 대통령이 화해한 것을 봤어요. 그 사람들이 르완다에 와서 공부해야 해요. 화해와 평화는 르완다가 잘하거든요.”
평화란 구분 짓지 않고 차별하지 않으며 서로 증오의 언어를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소박한 진실을 수많은 죽음을 겪고서 뼛속 깊이 깨달은 동시대인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키갈리 후예/전종휘 유덕관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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