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6.02 05:00
수정 : 2018.06.0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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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오후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페에서 주민들이 진흙에 빠진 차량을 밧줄로 빼내려 하고 있다. 이르가체페/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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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원정대-희망에서 널문까지
육로이동 수난기
사람이 밀고, 트럭·버스가 끌고
1시간 사투 끝에 빠져나와
한번 탔다 하면 평균 16.9시간
‘느림보 버스’에 엉덩이·허리 시련
화장실 못 갈까봐 끼니 거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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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오후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페에서 주민들이 진흙에 빠진 차량을 밧줄로 빼내려 하고 있다. 이르가체페/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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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현지시각)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페 취재를 마치고 아디스아바바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앞서가던 트럭이 진창에 빠져 헛바퀴를 굴렀습니다. 트럭은 30분 만에 탈출합니다. 다시 열린 길로 평화원정대의 9인승 승합차가 진입했습니다. 승합차의 바퀴는 트럭의 바퀴보다 형편없이 작았습니다. 원정대는 하릴없이 길 위에 갇혔습니다.
원정대는 지난 4월 초 남아프리카공화국 최남단 희망봉을 출발해 한사코 육로로만 가고 있습니다.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30일 현재까지 버스와 열차로 1만㎞가량을 왔습니다. 평화원정대가 육로를 열어 서울로 돌아오려는 이유는 대한민국은 섬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려면 남과 북의 길이 열려야 합니다. 그 길은 평화만이 열 수 있습니다. 갈 수 없는 길은 평화가 없는 길입니다. 갈 수 있는 길이라면 분쟁이 휩쓸고 간 곳이더라도 평화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굵직하게만 13차례에 걸쳐 220시간을 버스와 열차로 이동했습니다. 차 안에 머문 시간만 아흐레를 넘겼습니다. 한번 움직였다 하면 평균 16.9시간을 달린 셈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길을 간다’는 것은 그리 거룩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습니다. 이 대륙에서 나라 사이를 오가려면 일단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가서 목적지 나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탄다고 합니다. 그만큼 육로 사정이 열악하다는 얘기입니다.
가장 호된 시련을 겪은 건 원정대원들의 엉덩이와 허리입니다. 버스에선 한자리에 앉아 1시간만 지나도 하체가 쑤시기 시작합니다. 2시간을 넘기면 엉덩이가 의자에 눌어붙는 느낌이 듭니다. 왼쪽 엉덩이와 오른쪽 엉덩이에 힘을 나눠 실으면 그나마 낫습니다. 하지만 이내 허리가 아파옵니다. 패딩이나 목베개를 방석처럼 받치는 방법도 허리통증 때문에 오래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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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새벽 5시30분께 케냐 나이로비에서 모얄레를 향해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남성 5명이 내려 도로 위에서 무슬림 예배를 하고 있다. 한겨레평화원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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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못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서 허리와 골반을 한번 펴줍니다. 경험적으로 이 자세가 가장 시원하긴 한데, 위험성 또한 큽니다. 이 자세를 취하면 앞사람 윗도리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자칫 치한으로 몰릴지도 모릅니다. 원정대원 가운데는 탑승을 앞둔 몇시간 전부터 끼니를 거르는 이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고통보다는 배고픔의 고통이 낫다고 판단한 겁니다.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원정대가 버스와 열차로 움직인 평균 속도는 45.5㎞입니다. 툭하면 멈춰서 사람을 태우거나 물건을 싣는 이곳의 교통문화는 그러잖아도 갈 길 바쁜 버스의 꼬리를 붙잡습니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수시로 포트홀(노면의 움푹 꺼진 부분)과 마주칩니다. 생각 없이 달리다 바퀴가 이곳에 빠지면 큰 사고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특히 에티오피아의 도로 사정은 심각합니다. 아디스아바바에 접근하기 전까지 비포장도로가 워낙 많습니다. 포장도로라 하더라도 소나 염소, 양, 나귀 등의 동물이 거리낌 없이 도로 위에 누워 있거나 느릿느릿 건너다니는 탓에 수시로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지난 22일엔 케냐와의 국경지대인 모얄레의 포장도로에서 큰 나귀 한마리가 로드킬을 당해 누워 있는 끔찍한 장면을 봤습니다.
이날 새벽 5시30분께엔 케냐 나이로비에서 모얄레를 향해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남성 5명이 내려 도로 위에서 무슬림 예배를 하는 모습도 목격했습니다. 버스가 10여분 멈춰서 있는 동안 다른 승객들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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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오후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페에서 주민들이 진흙에 빠진 취재 차량을 꺼내기 위해 밧줄을 트럭에 연결하고 있다. 이르가체페/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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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진창에 빠져 낭패를 당한 승합차는 1시간 만에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밀고, 지나가던 트럭과 버스가 번갈아 끌어준 덕분이었습니다. 타자의 곤경에 손 내미는 것이 평화의 몸짓임을 길 위에서 배웁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더해져 아프리카의 ‘느림보 버스’는 앞으로 나아갑니다. 평화원정대는 이제 아디스아바바를 떠나 이집트 카이로까지 3660㎞ 거리를 이동합니다.
아디스아바바/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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