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7.10 10:24 수정 : 2018.07.12 18:03

이란 수도 테헤란의 ‘그랜드 바자르’는 중동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이다. 지난달 이곳 상인들은 달러 환율과 물가 폭등에 항의해 사흘간 문을 닫고 거리 시위를 벌였다. 시장이 다시 문을 연 지 나흘째인 지난달 30일(현지시각) 경찰들이 그랜드 바자르를 감시하고 있다. 테헤란/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평화원정대-희망에서 널문까지
⑫ ‘이란 핵협정’ 미국 탈퇴 뒤 테헤란

생필품 수입의존도 높아 물가 급등
한달새 집값 35%·자동차값 25%↑
항의시위 상인들엔 영업정지 처분
경찰 쫙 깔려 정부 비판도 ‘입조심’

이란 수도 테헤란의 ‘그랜드 바자르’는 중동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이다. 지난달 이곳 상인들은 달러 환율과 물가 폭등에 항의해 사흘간 문을 닫고 거리 시위를 벌였다. 시장이 다시 문을 연 지 나흘째인 지난달 30일(현지시각) 경찰들이 그랜드 바자르를 감시하고 있다. 테헤란/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국경에 있어야 할 경찰이 여기 다 와 있네”라고 어느 상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중얼거림은 이곳 ‘그랜드 바자르’에 흐르는 냉랭한 분위기와 맞닿았다. 이런 분위기가 10㎞에 이르는 골목 어귀마다 목봉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경찰 탓만은 아닐지 모른다. 전날 이곳에서 차로 40분 거리인 ‘모살라’(이슬람 사원)에서 만난 20대 여성의 말이 떠올랐다. “경제제재로 미국산 제품이 못 들어오지만, 국산 제품 품질도 충분히 좋아요.” 생필품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은 이 나라가 맞닥뜨린 사태를 국산 제품의 품질만으로 풀 수는 없을 것이다. 이란으로 들고 나는 물품을 막으려는 미국의 의도는 뚜렷한데, 경찰을 동원해 그랜드 바자르를 물샐틈없이 지키는 이란 정부의 의도는 뭐란 말인가.

지난 5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미국·중국·영국·프랑스·러시아), 그리고 독일이 2015년 7월 체결한 ‘이란 핵협정’(포괄적 공동행동계획)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이란은 가동중인 핵 프로그램을 중단했고,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오랫동안 지속된 경제제재를 해제하기로 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역사적인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한달 남짓 앞두고 인도양 건너편 이란과의 합의를 던져버렸다. 트럼프의 행동은 돌발적이었지만, 그가 핵과 관련한 어떤 국가 간 합의라도 쉽게 흔들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줬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기대하는 우리에게는 궤도 마루에서 곤두박질치는 롤러코스터를 상상하며, 오늘의 이란 핵 문제가 내일의 북핵 문제가 되지 않을지 걱정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중동 최대 재래시장의 상인들
“위기를 기회로” “국내생산 해법”
‘제재 일상화’ 문제없다 했지만…

상점 안 들어가 문 닫고 물으니
“고정환율 탓 작은 충격에 큰 영향”
“공장 지어 돌려도 경쟁력 없어”

지난 5월 미국이 ‘이란 핵협정’ 탈퇴를 선언한 뒤 이란에서는 반미 감정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각) 테헤란의 옛 미국대사관 건물 외벽에 그려진 해골 모양의 자유의 여신상 앞을 시민들이 지나치고 있다. 테헤란/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테헤란의 그랜드 바자르를 찾은 지난달 30일, 중동 최대 재래시장이라는 이곳 상인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점포가 다시 문을 연 지는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상인들은 24일부터 사흘 동안 점포 문을 닫고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를 했다. 이란 화폐 리알의 달러 환율이 급등하고 물가가 오르는 것에 대한 항의였다. 과거엔 그랜드 바자르 상인들이 사흘간 문을 닫으면 장관을 바꿀 수 있고, 일주일을 끌면 왕을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주동자 격인 상인들은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고, 경찰이 시장 전체에 깔렸다. 그랜드 바자르는 얼어붙었다.

처음에 말을 걸어본 몇몇 상인들한테서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겠다”는 유의 얘기밖에 들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직물을 수입하고 있는 모르테자 아사둘라히(32)는 “환율 변동이 심해서 국내에 공장을 지어 생산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며 “우리는 40년 가까이 경제제재 속에서 살았다. 문제없다”고 말했다. 잠시 주위가 혼잡한 틈을 이용해 다른 상인을 찔러봤다. “경찰이 왜 이렇게 많은가?” 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곁에 있던 상인이 주위를 살피며 툭 내뱉었다. “달러! 시위!”

상인들의 속내는 유리문이 달린 상점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서야 비로소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물품을 수입한다는 그곳 주인은 “정부가 그동안 억지로 달러 환율을 잡아놔서 작은 충격에도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했다. 현재 이란의 공식 달러 환율은 4만2000리알에 고정되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협정에서 탈퇴하자 암시장에서는 9만리알까지 뛰었다. 안전 자산으로 여기는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린 탓이다. 옆 점포의 상인은 “국내에 공장을 지어 돌린다고 해도 경쟁력은 없다. 말로만 저러는 것”이라고 했다.

이란이 생필품 수입 의존도가 높은 건 오랜 경제제재와 전쟁으로 산업이 발달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입품을 들여오는 달러 가격이 높아지면 곧장 물가까지 오른다. 6월 한달간 이란의 물가는 생활소비재 9%, 주택 35%, 귀금속 25%가 올랐다. 수입품 비중이 큰 자동차 가격도 25% 급등했다. 실물보다 심리가 먼저 흔들렸다. 암시장 달러 환율 급등은 징후적이다. 아랍 방송 매체 <알자지라>는 “이란 경제의 거시지표보다 이란 국민의 정치적·심리적 요인에 의해 리알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협상의 대가 트럼프에게 심리전은 매우 효과적인 전략일 것이다.

_________
모살라의 군중 “미국이 어떻게 나오든 우린 갈 길 간다”

이란 최대사원 매주 수만명 모여
구호에 맞춰 미국 비판 한 목소리
“두려움 없이 극복” “전쟁도 불사”
여기저기서 분노…삿대질·눈물도

‘신정국가’ 위기 때 종교에 기대
기도 시작되자 침묵하며 평화 기원

지난달 29일(현지시각) 테헤란 모살라(이슬람 사원)에서 열린 금요기도회에서 무슬림 신자들이 “타도 미국, 타도 이스라엘, 타도 시오니즘!”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 참가자(가운데)가 들고 있는 펼침막에도 ‘타도 미국’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테헤란/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하지만 전날(29일) 모살라의 분위기는 그랜드 바자르와 대조적이었다. 뜨겁고 단단했으며, 귀엣말을 속닥이는 사람도 없었다. 이날은 금요일마다 열리는 기도회가 있는 날로, 테헤란 모살라는 이란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마르그 바르 아메리카, 마르그 바르 이스라엘, 마르그 바르 시오니즘!”(타도 미국, 타도 이스라엘, 타도 시오니즘!)

모살라 안에서는 군중 3만여명이 연설자의 구호에 맞춰 손을 들어 소리치기 시작했다. 분노에 파르르 몸을 떨며 삿대질하는 남성, ‘타도 미국’이라고 적힌 머리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미국을 저주하고 있었다. 모살라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분리되어 있다. 모살라는 기도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종교인들은 정치·경제·외교 등 민감한 이슈를 주제로 삼아 연설했다. 매주 수만명이 모인다고 하니, 이란의 국민 여론이 이곳에서 만들어진다는 말도 지나친 과장은 아닌 듯했다.

미국과 우호적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예멘 침공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여기저기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 한 예멘인 신도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러 주변 사람들이 말리기도 했다. 일부 신도들은 “미국과의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때 두 아들을 잃었다는 아흐자 오미트바니(84)는 “미국은 전세계를 상대로 자기들 야욕을 추구한다. 미국 때문에 많은 젊은이가 전쟁터에서 죽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물심양면으로 이라크를 도왔다.

8월에 본격화할 미국의 경제제재에 대한 반응도 그랜드 바자르 상인들과 사뭇 달랐다. 기도회를 이끈 지도자 아야톨라 세디기는 신도들 앞에서 “미국이 어떻게 나오든 이란은 두려움 없이 헤쳐나갈 수 있다”고 역설했다. 6살 아들과 온 알리레자 모타하리(44)는 “이란은 이란이 갈 길만 가면 된다”고 했다. 두 딸과 참석한 에파트 모바헤드(48)는 “미국 때문에 이란이 복잡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란은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기도가 시작되자 수만명이 모인 모살라는 도서관처럼 조용해졌다. 미국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던 사람들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조국인 이란과 저마다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에 들어갔다.

이란은 신정국가다. 경제제재에 따른 위기를 이겨낼 힘은 그들이 믿는 종교에 기대하는 게 현실적인지도 모른다. 이익을 좇는 상인들이야 어차피 신정국가와 세속국가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국가체제든 지도세력의 신뢰성은 사회 구성원을 통합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_________
바자르 상인은 “석유 판 돈 어디 갔나” 부패한 정부 비판

경제 전문가들 양국 모두 비판
“미국 제재 탓 이란 세계화 위기
저소득층에 물가급등 부담 집중
정부의 무능한 경제팀 바꿔야”

테헤란 여론 “이란은 미국에 속고
국민은 정부에 속고 있다” 한숨

지난달 28일(현지시각) 이란 테헤란 페르도시 지역의 환전소 거리에서 한 환전상인이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 다. 미국이 ‘이란 핵합의’(포괄적 공동행동계획) 탈퇴를 선언한 뒤 이란 화폐인 리알의 달러 환율과 물가가 치 솟고 있다. 테헤란/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테헤란의 이맘 호메이니 국제공항에서 만난 한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경제 상황은 트럼프 탓이 아니다. 정부 탓이다. 속지 마라.” 이란 사람들은 지도층의 부정부패가 심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란에서 정부가 내놓은 공식적인 실업률 11.81%를 믿는 사람은 없다. 그랜드 바자르의 한 상인은 “이란은 석유와 가스가 엄청나게 매장돼 있다. 그동안 석유를 팔아 번 막대한 돈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올해 초 지방 도시에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됐지만 혁명수비대까지 동원한 진압에 저항이 사그라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의 경제방송 <이란이슬람공화국방송>(IRIB) 선임기자 알리레자 슈카티는 “이란은 세계화를 향해 걸어왔는데, 미국의 핵협정 탈퇴 등으로 그 길에서 벗어날 위기에 있다”며 “달러 가치가 오르면 산골 사람들까지 영향을 받는다. 이들도 생필품은 구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되물었다. 이 방송사의 경제담당 기자 샤얀 자파리는 “돈 있는 사람들은 가격이 뛰기 전에 집이나 물건을 사놓기 때문에 오히려 큰 이익을 챙긴다”며 “물가 급등의 부담은 결국 저소득층에게 집중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들은 조심스럽게 표현했지만, 카타르에 본사를 둔 <알자지라>는 이란 경제 전문가의 말을 빌려 “정부의 무능한 경제팀을 바꿔야 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랜드 바자르에서 자동차로 20분을 달려 도착한 테헤란의 페르도시 지역 환전소 거리는 고적했다. 환전소가 몰려 있는 세계무역센터의 환전소들은 불이 꺼져 있었다. 환전소 앞에는 “사고팔지 않습니다. 질문하지 마세요”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한 환전소 직원은 “정부가 거래를 하지 말라고 해서 돈을 바꿔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암시장 상인들은 슬그머니 다가와 “7만5000리알” “8만1000리알”이라며 암호 같은 말을 툭툭 던졌다. 달러를 사고파는 환율이었다.

테헤란에서 만난 이들은 “믿지 말라”는 말을 많이 했다. 이란은 미국에 속았고, 국민은 정부에 속고 있다. 이란 사람들은 번갈아 ‘트럼프 탓’과 ‘정부 탓’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이란 보수 정부의 ‘적대적인 공존’은 과거 남북한 사이를 보는 듯했다. 미국의 핵협정 탈퇴 여파는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환율 다음은 물가와 실업률이다. 이란-미국 사이의 신뢰가 깨진 상황에서 재협상도 어렵다. 한 이란인은 “유럽이 핵협정을 연장할 어떠한 제안을 하지 못하면 이란은 핵무기를 다시 만들고 협상하는 수밖에 없다”고 소리를 높였다.

이미 호르무즈 해협에는 석유수출 봉쇄 등을 두고 긴장이 높아졌다. 이란은 미국과 무려 8년 동안 협상했다. 그 합의마저 미국에 의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평화’의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지를 테헤란은 보여주고 있다. 테헤란/이완 유덕관 기자 wani@hani.co.kr

_________
한 장의 평화

지난달 28일(현지시각) 이란 경제방송 <이란이슬람공화국방송>(IRIB)의 알리레자 슈카티 선임기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평화의 뜻을 담은 ‘한장의 평화’를 써서 보여주고 있다. 슈카티 기자는 페르시아어로 인류애를 의미하는 ‘앤 써니 앗’을 평화의 뜻으로 풀었다. 테헤란/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한겨레 창간 30돌] 평화원정대 : 희망봉에서 널문리까지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