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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8.15 05:00 수정 : 2018.08.15 11:02

평화원정대-희망에서 널문까지
(17) 안 의사 순국한 뤼순감옥을 가다

남북 10년 전 발굴작업 성과 못내
뤼순감옥 주변 20만㎡ 옛 숙소·묘지
추가 발굴해볼 만한 곳 아직 남아
문 대통령 “남북 공동 유해발굴 추진”

<한겨레 창간 30돌 특별기획-평화원정대, 희망에서 널문까지> 인터렉티브 바로보기

지난 12일 오후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일러감옥옛터박물관의 안중근 의사 추모관에서 한 관람객이 안 의사의 영정사진을 스마트폰에 담고 있다. 안 의사 추모관은 수많은 공산주의 계열 중국 해방열사들 사이에서도 가장 눈 에 띄는 자리에 있다. 다롄/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거리는 120여 걸음에 불과했다. 108년 전 뤼순감옥에 갇힌 조선의 31살 청년 안중근은 일본의 ‘국사범’ 취급을 받으며 다른 죄수와는 떨어져 일제 간수부장 당직실 옆 독방에서 홀로 지냈다. 그 방에서 그가 처형당한 형장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불과 50여m.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그는 그 짧은 절대고독의 시간, 무슨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을까.

한국처럼 따가운 뙤약볕이 내리쬐던 지난 12일 오후 <한겨레> 평화원정대가 찾은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의 옛 뤼순감옥. 뤼순일러감옥옛터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그곳엔 휴일을 맞아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성을 확인하려는 중국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일제의 폭력에 맞서다 스러진 수많은 공산주의 계열 중국 해방열사들 사이에서도 안중근 의사는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그 옆엔 그 뒤 같은 감옥에서 순국한 우당 이회영 선생을 비롯해 최흥식, 유상근 선생의 업적이 함께 전시됐다.

108년 전 31살 청년의 혼 서린
옛 뤼순감옥, 이젠 박물관으로
폭염에도 중국인 발걸음 이어져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안 의사 영정

“청일전쟁 뒤 중국·한국 양국 국민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은 20세기 초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때부터 시작됐다.” 1963년 6월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담화에서 내놓은 안 의사 의거에 대한 평가다. 중국 쪽이 해방투쟁사에서 안 의사를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놓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언급이다.

그럼에도 남과 북이 아직 안 의사의 주검조차 찾지 못한 대목은 뼈아프다. 문재인 대통령은 14일 안 의사의 증손자 토니 안씨 등 독립유공자와 유족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내년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정부는 북한과 공동으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 사업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남과 북은 2008년에도 뤼순감옥 터 북쪽 안 의사 유해가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터 3000여㎡를 대상으로 공동발굴 작업에 나섰으나 동물 뼛조각과 도자기 몇 점만 건진 채 발굴 작업을 마친 바 있다. 결국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객지에서 숨진 이의 주검을 고향으로 모시는 일)해 달라”던 안 의사의 유지는 108년이 지나도록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서울 효창원에는 1946년 백범 김구 선생이 조성한 안 의사의 가묘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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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는 남북 모두 추앙…공동의 역사 써보자”

지난 12일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일러감옥옛터박물관 바깥을 관람객들이 오가고 있다. 박물관 너머로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다롄/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12일 평화원정대가 찾은 10년 전 남북 공동발굴 작업 터엔 아파트 여러 동이 이미 들어서 있었다. 팅린시구라는 이름의 16층짜리 아파트 베란다엔 집집이 빨래와 위성방송 안테나, 에어컨 실외기가 내걸리는 등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 주변에도 다른 아파트촌이 건설되거나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인 조용한 주택가로 조성됐다. 앞서 평화원정대에 뤼순감옥을 설명해준 박물관 해설사 왕리리는 “감옥 건물이 들어선 2만6천㎡ 말고 주변 20만㎡가 원래 간수 숙소와 임업장, 공동묘지 등으로 쓰였다”고 말했다. 추가로 발굴해볼 만한 곳이 아직 남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안 의사 유해가 묻힌 곳에 관한 구체적인 추가정보 없이 이곳저곳 발굴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향후 중국과 일본 정부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눈귀가 쏠리는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해방되면 고국에” 유언 아직 못지켜
전문가 “유해 발굴 실패 교훈 삼아
서두르지 말고 과정 중요시해야
안 의사 중심 역사 남북 함께 정리를”

장석흥 국민대 교수(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는 평화원정대와의 전화 통화에서 “그동안 유해를 찾으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비전문가들이 신뢰할 만한 정보도 없이 이벤트성으로 접근하고 정부 관료들은 당장의 성과에 급급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장 교수는 “유해 발굴은 매우 길고 지난한 일이라는 걸 먼저 인식하고 유해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중시해야 한다”며 “안 의사의 유해를 찾으려는 이유는 동양의 평화를 위한 그의 염원을 우리 시대의 염원으로 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안 의사가 묻혔을 것으로 보이는 일대를 나타내는 조형물 등을 우선 설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남과 북이 안 의사 유해 발굴 못지않게 일제에 맞서 싸운 해방까지의 근대사를 공동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과정에서 남한과 북한 모두 그 의의를 부정하지 않는 안중근 의사 등을 중심으로 차근차근 역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좁혀갈 수 있지 않으냐는 얘기다.

김성호(67) 연변대 교수(전 조선력사연구소장)는 지난 9일 지린성 연변대 연구실에서 평화원정대와 만나 “남한은 김일성 장군의 항일투쟁 업적을 인정하지 않고 북쪽은 상해임시정부, 광복군, 조선의용군을 평가하지 않고 있다. 남북한 모두 여전히 분단사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며 “안중근, 신채호 선생처럼 남북 양쪽 모두 인정하는 분들을 중심으로 시작해서 8·15 광복까지 공동의 역사를 쓰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롄 옌지/전종휘 유덕관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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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한겨레 창간 30돌] 평화원정대 : 희망봉에서 널문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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