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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8.28 01:22 수정 : 2018.08.28 11:25

평화원정대-희망에서 널문까지
(18) 북-중 접경지대 ‘6개의 풍경’

[인터랙티브] 바로가기▶ <한겨레 창간 30돌 특별기획-평화원정대>

북한 배경으로 한복 빌려 입고… 투먼 북-중 접경지역에서 한복을 빌려 입고 기념사진 을 찍는 중국인 관광객들. 투먼/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평화는 아득하다가도 불쑥 눈앞에 다가와 있는 듯도 했고, 또 시나브로 멀어지다 신기루처럼 흔들리는 듯도 했다.

지난 4월 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여정을 시작한 <한겨레> 평화원정대는 불과 몇주 뒤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소식을 듣고 기쁨의 한편으로 조바심을 느꼈다. 평화원정대가 가야 할 거리는 아직 까마득해서, 북-중 접경지역에 이르기 전에라도 남과 북이 자유왕래를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우였다. 8월 중순 이후, 평화원정대는 내내 북-중 접경지역 일대를 오갔다. 손에 닿을 듯한 강 너머를 바라보며 두만강과 압록강 물길 옆을 동-서로 길게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까우나 가닿지 못하는 한반도 평화에 관한 은유처럼 보였다.

#1. 북한 돈이라는 ‘상품’

빳빳한 ‘북한 돈 기념품’ 내민
중국 상인 “견본 2장 빼곤 진짜”
북 중앙은행 권위 따윈 관심밖

“한국 돈도 받아요. 9천원.”

어색한 억양의 우리말이 관광객을 부른다. 두만강 연안 도시 중국 지린(길림)성 투먼(도문)에서 만난 상인은 북한 돈 수집책을 펼쳐 보인다. 표지에 ‘조선돈’이라고 적힌 책엔 북한 지도자의 초상이 있는 50원짜리 우표가 3장, 5000원, 500원, 200원 등 모두 6천원어치가 좀 넘는 빳빳한 새 지폐가 들어있다.

진짜 돈일까? 상인은 ‘견본’이라고 적힌 2장 말고는 모두 진짜라고 했다. 지폐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은행 표시와 일련번호가 있다. 북한 돈 6천원의 가치는 공식환율로는 한국 돈 6만1천원이지만, 시장환율로는 840원 정도다. 공식환율과 시장환율 격차가 큰 이유와 관련해, 양문수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이중경제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개혁·개방 초기 중국·베트남도 비슷했다”고 말했다.

북-중 접경지역을 돌아보기 위한 출발점이었던 투먼에서 처음 맞닥뜨린 ‘북한 돈 세트’는 단둥(단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두만강·압록강 주요 도시에서 기념품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가격 차이가 조금씩 나긴 했지만, 하나같이 시중에서 쓰인 적이 없는 듯 빳빳한 새 돈이었다.

혹시나 싶어 알리바바의 인터넷쇼핑몰 타오바오에서 검색해보니, 북한 돈 5천원(공식환율 5만800원, 시장환율 700원)짜리 지폐를 0.99위안(162원)에 팔고 있다. ‘진짜’를 확신하는 댓글이 달려 있지만, 터무니없는 가격을 고려하면 가짜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접경지역의 ‘북한 돈 세트’라고 다를까.

러시아나 베트남 접경지역 중국땅에서 건너편 나라 위조지폐를 기념품으로 파는 일은 없다. 중국이 북한 중앙은행의 권위를 조금이라도 신경 쓴다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이토록 무례한 기념품이 북한과 분단된 나라에서 온 관광객의 호기심을 겨냥한 얕은 상술이라는 점에서는 남북 평화에 대한 반면교사로 보이기도 했다.

북한 남양역이 코앞 8월 중순 중국 지린(길림)성 투먼(도문)시 북-중 접경지역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두만강의 도문다리에 올라 북한 함경북도 온성시 남양리 쪽을 건너다보고 있다. 투먼/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2. “러시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북-중-러 3국 접경 훈춘 오자
러시아 기지국서 로밍 메시지
북 통신 고립돼 전파도 갇혀

북-중-러 3국 국경이 만나는 훈춘 팡촨(방천) 풍경구에 도착할 즈음, 휴대전화에 생각지 못했던 ‘러시아 로밍 요금 안내’, ‘러시아 여행 주의사항’ 메시지가 떴다. 국경에 가까워지니 러시아 기지국의 신호를 잡으면서, 해외 로밍이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북-중 접경지역을 다니는 내내 휴대전화에 ‘북한 로밍 요금 안내’ 메시지가 뜨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북한의 휴대전화 보급 대수가 400만대에 이른다고 하지만, 다른 나라 통신사와 로밍을 위한 협약이 체결되지 않은 탓이다. 취재 등 목적으로 방문하는 일부 외국인은 심카드 구매를 통해 북한에서도 자유롭게 인터넷을 사용한다지만, 대부분 관광객에겐 이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북한 관광을 다녀왔다는 중국인들은 ‘통신 두절’에 대한 엇비슷한 사연을 털어놓는다. 북한에 도착한 뒤 줄곧 휴대전화가 신호를 못 잡다가, 특정 지점에 도착하자 갑자기 해외 로밍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바로 판문점 인근의 한국 기지국 신호를 잡은 것이다. 각종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보면, 중국인 이용자가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접했다면서 평양, 개성, 판문점 등에서 찍은 사진을 기념 삼아 올린 것을 더러 보게 된다. 전파는 국경의 장벽을 넘나들기에 평화의 전령 같지만, 그중 하나의 장벽을 넘지 못하기에 유예된 평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신의주 관광 갔다가… 8월 중순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압록강 철교 위로 이날 북한 신의주시 1일 관광에 나섰던 중국인들을 태운 버스가 돌아오고 있다. 단둥/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3. 통과 없이 관광만 하는 국경

강건너 고추 말리기도 볼거리로
라선 당일치기·신의주 2박 등
중국인 무여권 북한 여행 즐겨

북-중 접경지역이 여느 국경과 다른 게 있다면 많은 이들의 주된 방문 목적이 ‘통과’가 아닌 ‘관광’이라는 점이다. 통과하지 않을 국경에 갈 일이 뭐가 있으랴만, 이곳은 다르다. 백두산은 말할 것도 없고, 강폭이 20~30m밖에 되지 않는 두만강 상류 투먼과 압록강 상류 창바이(장백)에서도, 바다가 가까워진 두만강 하류 팡촨(방천)과 압록강 하류 단둥에 이르기까지, 주된 방문객은 중국 안팎에서 온 관광객들이었다.

온전히 개방되지 않은 나라는 국경 지역의 일상이 관광상품이 된다. 관광객들은 강가에서 북한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북한 쪽에 사람이 지나가면 사람을 보며, 차량과 열차가 지나가면 또 그것들을 보며 신기해했다. 지붕에 고추를 말리는 사람들도, 강에서 멱을 감는 아이들도, 고기 잡는 청년들도, 빨래터의 아낙네들도 모두 구경거리가 됐다. 단둥 압록강변에서 한 중국인 가족은 북한 쪽 밤 풍경을 보며 “저것 봐. 불이 다 꺼져서 캄캄해”라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무엇이 찍혔는지 알 수 없다.

주요 도시에서는 중국인들을 위한 ‘무여권 당일치기 북한 여행’이 이뤄지고 있었다. 중국인 신분증만 있으면 여권·비자 없이 하루 일정으로 북한에 다녀오는 코스다. 두만강 하류 훈춘에서는 북한 라선시에 가서 동해산 수산물을 먹고 돌아오는 여행상품이 있었다. 압록강 중류 린장(임강)에서는 강 건너 양강도 혜산시와 자강도 중강군을 둘러보고 온다. 이미 널리 알려진 단둥~신의주 프로그램은 어느새 반일, 1일, 2일짜리로 상품이 세분돼 있었다.

_________
중국 사업가들, 북 들락날락 “제재만 풀리면…” 몸풀기 한창

#4. 중국이 먼저냐, 한국이 먼저냐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 소문 퍼져
북에 지을 시설 조감도 보여주기도
한국 기업인 “껍데기만 남을라”

경제 숨맥 이을 두만강 다리 8월 중순 중국 지린성 투먼시 북-중 접경지역에서 북한 함경북도 온성시 남양리를 연결하는 옛 다리(왼쪽)와 새로 건설 중인 다리가 보인다. 투먼/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국적을 불문하고 대북 사업을 하는 기업인들은, 한반도 정세 완화에 기대를 품고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가 풀리기만을 기다리는 모양새다. 거꾸로 말하면, 대북제재가 풀리지 않는 한 대북 교역의 원만한 재개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접경지역에선 “제재 풀리면 먼저 들어가서 잡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렸다.

우리 생각에야 같은 핏줄인 남한이 북한과의 최우선 협력상대이기를 바라지만, 사정은 그리 간단치 않아 보인다. 조선족기업가협회 집행회장을 맡고 있는 전규상 천우건설 회장은 “북한도 고속도로, 철도, 도시 기초시설 건설 등 계획은 있는데, 국외의 돈과 기술이 필요할 것”이라며 “내가 알기로 북한은 어느 정도 선을 그어놨다. 어느 지역은 한국이, 어느 지역은 중국, 어느 지역은 미국이 한다는 식”이라고 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등 핵심적인 남북 경협 사업은 휴전선 가까운 곳에서 진행돼왔다. 여기에 비추어 전 회장 말을 되새겨보면, 북-중 접경지역은 지척에 있는 중국 자본이 가장 먼저 뛰어들 가능성이 크다는 예상도 가능하다. 훈춘에서 만난 중국인 사업가가 북한 라선 지역에 지을 계획이라며 이런저런 시설 조감도를 보여줬을 때, 이런 생각은 한층 강해졌다.

자연 조건상 접경지역은 북-중이 공유해야 할 자원이 있는 것도 현실이다. 지안(집안) 근처 압록강에서는 린투의 왕장러우(망강루)와 창촨의 원위에(문악) 수력발전소 공사가 한창이었다. 인근 기존 발전소들처럼 이곳에서 생산된 전기는 북한과 중국이 나눠서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업가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북한을 드나드는 이점을 누린다. 한 중국인 대북사업가는 “지금 시작하면 리스크는 좀 커도 나중엔 이윤이 줄어들 수 있으니 중국 기업들이 너도나도 북한에 가려고 한다”며 “한 달에만 4개 팀을 데리고 가고 있다”고 말했다. 단둥에서는 북한으로 들어가는 국제열차표가 금세 매진돼 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단둥의 한국 기업인은 “지금은 유엔 제재와 각종 국내 조처 탓에 속수무책이지만, 나중에 우리에게도 기회가 오긴 할 것”이라며 “그러나 그때는 중국이 좋은 몫을 다 차지하고 껍데기만 남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든다. 원래 남한 몫이라고 생각했던 곳들도 중국 자본에 둘러싸인 형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5. 제재와 밀수

북-중 국경엔 관광객들만 북적
수산물 등 양국 교역은 사라져
헤엄쳐 건넜는데 이젠 밀수 단속

환한 단둥 저쪽은 캄캄한 신의주 8월 중순 압록강을 사이에 둔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다리 아래쪽)와 북한 평안북도 신의주시의 야경. 불빛의 밝기 차이가 두드러진다. 단둥/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중국의 대북제재는 엄격하게 집행 중이라는 게 중론이다. 훈춘의 북-중 경협 관계자는 “현재 커우안(국경의 세관 및 출입국 관리 시설)에는 관광객들만 가득할 뿐, 의미 있는 교역이 이뤄지고 있지는 않다. 공식 자료는 없지만 제재에 묶여 있어 실질적인 규모의 무역은 없다고 보면 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동해 쪽 항구가 없는 중국에서 훈춘은 동해산 수산물이 들어오는 관문 구실을 한다. 그러나 지난해 8월 이후 북한 수산물도 유엔 제재 대상 품목으로 묶였다.

접경지역에서 일부 밀수가 이어진다는 이야기가 때때로 나오지만, 중국 쪽이 각종 이유로 단속을 강화하면 금세 바싹 움츠러드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최근 단둥의 밀수 단속이 한층 강화됐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이는 다음달부터 국경 지역 치안 관리 부처가 바뀌는 상황과 연관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발과 바지를 좀 적셔도 괜찮다면 두만강과 압록강 상류에선 몇 발짝이면 국경을 넘을 수 있어 보였다. 언젠가 혜산 출신 탈북자가 “어릴 적부터 국경은 수시로 넘어다녔다”는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 무슨 뜻인가 했는데, 실제 혜산 건너편의 창바이(장백)조선족자치현을 가보니 정말 지척이었다. 강가엔 철조망도 없었다. 중류 린장에서도 청년들이 헤엄쳐서 강 이쪽저쪽을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북-중은 강 전체를 국경으로 삼기 때문에 강에서 헤엄치는 것은 ‘월경’이 아니다.

서로 언어마저 통하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오가며 물물거래를 하는 것을 지금은 ‘비법(불법) 월경’과 ‘밀수’라고 부르며 단속한다. 그러나 옛날의 풍경은 아마 달랐을 것이다. 한 대북사업가는 “북한 사람들은 과거 중국이 어려웠을 때 자신들이 도와줬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는데, 실제 1950~60년대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 중국에서 북한 쪽으로 건너간 사람들 이야기도 접하곤 한다”고 말했다.

#6. 폭염도 공유하는 ‘운명공동체’

단둥선 올 여름 폭염 함께 겪어
접경지역은 한반도와 운명 공유
“북 열리면 엄청난 기회” 기대감

북-중 접경지역인 중국 창바이(장백) 조선족자치현 압록강 건너편 북한 양강도 김정숙군의 들녘에서 북한 주민들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다. 창바이/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단둥은 한반도에 붙어있다시피 한 도시다. 그 덕에 올해 여름 한반도의 폭염도 고스란히 함께 겪었다. 선선한 강바람 덕에 여름철 ‘피서’로 유명했던 곳인데, 섭씨 37~38도의 더위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더위가 낯선 주민들이 더위에 대거 에어컨 구매에 나서면서 설치기사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에어컨을 오늘 사도 설치는 15일 뒤에나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한반도 정세 완화로 부동산 시장이 달아오른 것과 함께 “두가지가 뜨거운 단둥”이란 말도 있다고 했다.

북-중 접경지역의 많은 도시들은 좋든 싫든 앞으로도 한반도와 운명을 함께할 공산이 크다. 린장에서 만난 한 중년 남성은 “변경지역에선 조선(북)이 개방해서 경제적 기회를 가져올지에 다들 기대가 크다. 모두의 바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압록강변의 북한 주민들은 여전히 소를 부려 농사를 지었고, 통나무를 베어다 뗏목을 만들고 있었다. 같은 공간임에도 뭔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훗날 이 시기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올해를 민족사에 특기할 사변적인 해로 빛내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변’은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사변이 오는 일은 오로지 사람 손에 달린 것처럼 보였다.

훈춘 지안 단둥/김외현 특파원, 전종휘 유덕관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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