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칼럼 |
[김성윤의 아포리아] 노동과 예술이 만났을 때 |
예술가 ㄱ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밥은 좀 먹고 예술 합시다. 예술가도 노동자예요.” 덕분에 예술인 복지제도가 마련됐고 그 밖의 예술-노동 의제들도 공론화되고 있다. 다른 한편, 아이티 업계의 노동자 ㄴ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피곤하지만 어쩔 수 없죠. 우리는 작품을 만드는 장인이에요.” 덕분에 그들의 초과노동은 신성한 것으로 격상되고 더불어 4차 산업혁명도 추진력을 얻는 느낌이다.
곱씹어보면 신기한 자기서사가 아닐 수 없다. 예술가는 노동자가 되려 하고 노동자는 예술가가 되려 하고 있다. 세상은 더디게 움직이지만 참 빨리도 변한다. 이것도 우리가 적응해야 할 시대적 흐름이라면 흐름인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 우리가 알던 예술과 노동에 대한 통념들이 휘몰아치면서 전연 다른 방식으로 재편되는 형국이다.
물론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실업과 빈곤과 채무 등등의 문제에서 예술가들이 노동권을 쟁취하려 하고 사회안전망을 요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그런 한에서만 연대할 수 있고 세상을 바꿔낼 수 있다.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을 예술가에 준하는 존재로 상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하는 일을 의미화함으로써 우리는 숙련성을 높이고 나아가 노동자계급으로서의 자기인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으로 진입할 것만 같다. 적어도 이런 추세가 비가역적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제는 사회적 권리 문제가 가장 긴급한 시민적 요청이 되었고, ‘플랫폼’ 등의 등장으로 자기고용 관행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때문에 예술가가 ‘나는 노동자’라 선언하고 거꾸로 노동자가 ‘나는 예술가’라 자칭하는 것이 이제 요상한 일만은 아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오늘날 예술과 노동은 수렴하고 있는 것일까. 좀 더 낭만적으로 말한다면,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는 것일까.
뭔가 극적인 화해가 일어나는 것만 같은 느낌인데 우리는 여기서 어떤 곤란을 마주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개개인의 정체성 차원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예술가가 노동자성을 내세우는 사이에, 이른바 동시대 예술은 정치적이고 미학적이라기보다는 갈수록 관계지향적이고 사회보존적인 표현들을 내놓고 있다. 또한 배달 알바가 라이더가 되고 개발자가 창조자가 되는 동안, 이른바 공유경제에서의 노동은 계급적 처지와 관계를 전화시키기보다는 ‘을’의 권리를 수호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움을 호소하고 있다.
어쩌면 트로이의 목마 같은 게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사회적 권리와 문화적 권리가 보장받기를 원한다. 분명 예술가들의 삶의 질은 증진되어야 하고 노동자들의 일은 더 가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고 있다. 예술가의 작업은 각종 기관의 필요에 따라 영감을 착취당하고 사회화되며, 노동자의 노동은 고용주와 소비자의 호출에 따라 과로에 시달리고 유연화된다.
물론 애초에 우리가 기대했던 건 다음과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예술이 노동의 편에 서고, 노동이 예술로부터 영감을 얻는 것. 그렇기에 모든 것을 융합하는 세상을 향해 예술과 노동이 어쩌다 이런 식으로 조우하게 됐는지를 반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침 일종의 부적응자가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고 어떻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예술가 ㄷ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건 아니죠. 우리가 용역은 아니잖아요.” 노동자 ㄹ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회복 시간이 필요해서 퇴사를 결정했어요.”
마냥 흘러만 가는 맥락들을 단절해내려는 사회적 반응들인 셈이다. 앞으로 이런 목소리와 몸부림들이 축적되고 나아가 새로운 국면을 열어줄 수 있을까. ‘생존’을 넘어 ‘실존’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몸부림 말이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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