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용욱의 편지로 읽는 현대사
⑤ 암시장과 재일조선인
전후 사회·경제 혼란에 일본 식량난
야쿠자 등 주도하는 암시장도 극성
관료·경찰 등 부패·비리 때문인데도
“조선인은 열등 인종…추방해야”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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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이 끝난 직후 일본 사회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고, 암시장이 성행했다. 암거래 상인들이 생선을 서로 사려고 고기잡이에서 돌아온 배에 달려들고 있다. 이러한 암거래 때문에 도쿄 시민들은 당시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서는 한동안 생선을 살 수 없을 정도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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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시 히가시구에 주소를 둔 한 관리가 미군이 일본에 진주한 뒤 두달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현재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그 내용으로 하는 편지를 맥아더 사령부에 보냈다. 그는 그 편지에서 현재의 식량 부족 원인이 조선인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조선인은 일본인의 4배를 먹고, 이들이 암시장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조선인 200만명이 일본인 800만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먹어치우므로’ 조선인들을 조속히 귀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식량 부족인’이라는 가명으로 쓴 1947년 2월의 한 편지는 ‘100만명의 조선인을 돌려보내면 식량 부족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고, 범죄도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신체적·생리적 차이를 패전 직후 일본의 식량 부족과 조선인들의 암시장 관여 원인으로 꼽은 것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쓴웃음을 짓게 만들지만 그는 그렇게 밥통이 큰 조선인들을 왜 대규모로 강제 동원해서 일본의 광산과 공장에서 배를 곯게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일본의 국익에 충실한 한 관리가 식민지인에 대한 공포와 우려 때문에 점령당국을 상대로 조선인에 대한 흑색선전을 펼친 에피소드의 하나로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위의 편지들은 적지 않은 일본인이 일본 패전 직후의 경제적 곤란과 사회적 혼란의 책임을 식민지인들에게 전가하는 전도된 인식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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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2월 일본 경찰이 도쿄의 밀주업자를 덮쳐서 제조를 끝낸 밀주 및 발효 중인 술통을 압수한 장면.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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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은 4배 더 먹어” 황당한 주장
두 편지는 조선인을 식량 부족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조선인들의 조속한 귀환을 식량 위기의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공식 귀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1946년 4월 이전 이미 많은 조선인이 귀환했지만 식량 위기는 1946년 5~6월에 절정에 이르렀다. 패전 직후 이른 시점부터 이러한 인식이 표출될 수 있었던 사회심리적 토대나 배경이 궁금하지만 두통의 편지는 일본 사회가 전쟁의 원인이나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 문제와 관련해서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제대로 마련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일본 사회는 패전 직후의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혼란에 즉자적이고 감정적으로 반응했으며, 재일조선인이 패전 직후부터 그러한 경제적 곤란과 사회적 혼란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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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에서 식량난 등이 심각해지자, 그 원인을 재일조선인에게 돌리는 일본인이 많았다. 마에다 젠지로가 1947년 8월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를 요약한 내용이다. 그는 “조선인은 본래 열등한 민족으로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용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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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은 열등한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마에다 젠지로의 편지 일부. 미국국립문서관, 정용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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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편지들은 식량 위기의 해결이라는 경제적 이유에서 조선인의 조속한 귀환을 촉구했지만 동시에 조선인을 암거래자, 우범자 등 각종 사회문제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했다. 아래 편지는 발신자가 조선인을 각종 사회문제의 주범으로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종적 편견과 연결해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인은 중국인, 일본인보다 열등한 인종이고, 조선인이 일본의 경제를 착란시키고, 일본의 치안을 어지럽히며, 절도, 소매치기 등이 조선인의 집단적인 직업이고, 식료, 기타 중요 물자를 매점하므로 모든 조선인 가정을 수색하여 숨긴 물자를 압수하고, 이들을 조선으로 추방하기 바랍니다.”(마에다 젠지로, 1947.8.7.)
일본 패망 이후 일본이나, 한반도나 모두 커다란 경제적 곤란과 사회적 혼란에 빠졌고, 주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모든 사회경제적 혼란과 민중이 겪은 생활고의 구조적 배경은 전전(戰前)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착취에 있지만, 조선인은 전전에는 그러한 침략과 착취의 희생자가 되었고 전후에는 재일조선인이 일본의 사회경제적 위기와 혼란을 초래한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일본인 편지들은 이 문제와 관련해 암시장에서 조선인의 발호를 비난했다.
패전 직후 일본의 세태를 ‘여자는 팡팡, 남자는 장돌뱅이’로 묘사하곤 한다. 팡팡은 성매매 여성 또는 ‘양공주’를 일컫는 당시 속어다. 일본어 ‘가쓰기야’(?ぎ屋)는 장돌뱅이, 밀매인, 야바위꾼 등을 일컫는다. 이들 용어에 나타나듯이 암시장은 패전 직후 일본 사회의 경제적 존재 방식을 규정했고, 일본인들의 일상이 영위되는 주요한 공간이었다. 흥미 있는 것은 점령 직후만 하더라도 편지에 나타난 암시장의 횡포에 대한 비판과 비난의 초점은 대부분 군국주의자들과 전범들, 암시장을 움직이는 자들이 한통속이고, 경찰이 암시장을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맞춰졌다. 아래 편지들이 그 점을 구체적으로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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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시 히가시구에 사는 이노우에 후쿠조라는 하급 관리는 1945년 10월 미군 사령부에 보낸 편지에서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4배 많이 먹고, 암거래 상인의 절반을 차지한다”며 그들을 내쫓을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와 함께 경찰 등 관료들의 부정·비리 행위도 고발했다. 조선인 서술 부분 이외의 다른 부분은 구지배층과 지배구조의 모리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정용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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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후쿠조의 편지 중 조선인을 언급한 부분. 정용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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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 5할 감원에 관한 건. 지방행정기관 및 작업관청, 각 대공장, 은행, 상선회사 등의 중간관리와 이에 준하는 회사원 및 은행원들이 전쟁 중 군과 결탁하여 하급자 또는 노동자를 억압하고, 또는 경찰, 부청, 현청 등과 연락하여 행한 악랄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종전 이후에는 위와 같은 행동이 더욱 심합니다. 그리고 또 정회장(町會長), 정 경제부장 등이 이에 관련되어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물품을 은닉했습니다. 예컨대 담배를 취급하는 전매국 관리는 국민에게 배급해야 할 담배를 자신의 주식물과 교환하여 사유화하고, 군용미, 설탕, 유류 등을 모아서 몇십만원이라는 축재를 자행한 사람들은 아사지경에 있는 국민을 오히려 불가사의하게 보고 있으니 이는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특권계급에 있는 사람들은 일본의 민주주의와 맥아더 원수의 선량한 시정에 반하는 일입니다.”(와타나베 마사요시, 1945.12.4.)
“도나리구미(隣組)는 지나사변(중일전쟁) 중의 산물이지만 대동아전쟁에 이르러 활동이 가장 컸다. … 상의하달(上意下達), 하정상통(下情上通)의 기관이라는 선전은 구실일 뿐 순수한 전쟁 동원기구 역할을 했다. 식량배급의 하부기구로서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 정회 임원, 배급소 관계자가 군부를 배경으로 위세를 부렸고, 그들은 지금도 의연 그 지위에 있다.”(하루다 데쓰오의 편지, 1946.1.7.)
“소처럼 일하고 그을린 쌀로 연명
암시장 유혹받는 한국인 있으나
모두가 그렇다고 하는 건 불공평”
징용당한 제주 출신 청년의 항변
영어 배우려 일본에 남은 조선 청년
점령 초기에 일본인들이 점령당국에 보낸 편지들에서 구지배층의 모리(謀利) 행위를 고발하는 편지는 흔하게 발견된다. 편지는 암거래 물품이 군수창고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군인·군속, 관리 등 군국주의자, 전범으로 분류되는 자들이 물품 공급자로 지목되었고, 경찰은 그 관리자로서 암거래를 조장했으며, 그것을 단속하기는커녕 암시장 상인과 암거래 당사자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편지들은 물가폭등과 암거래의 원인으로 구지배층, 또는 구제도로부터 혜택을 받던 ‘전쟁 수익자’들을 지목하고 그들을 비난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암시장에서 경제를 혼란시키는 주범으로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 등 ‘제3국인’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비난의 초점이 바뀌었다.
종전 이전 일제에 의해 징용되어 도쿄로 끌려온 한 조선인 청년이 그러한 일본 사회의 기류 변화를 1946년 5월 맥아더에게 쓴 편지에서 담담히 풀어놓았다.
“저는 조선의 남쪽 끝자락에 있는 자그맣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자란 조선인 청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28명의 다른 이들과 함께 징용되어 무리의 우두머리로 도쿄에 왔습니다. 징용자 대부분은 무지렁이지만 순진했고, 어부로 평온하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강제로 도쿄의 한 철공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소처럼 중노동을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열악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신발도 주지 않았습니다. 공습 때 불타버려 반이 그을린 쌀과 상한 무짠지 두어쪽이 우리의 주식이었습니다. … 회사의 관리들이 시청이 우리에게 배급해준 쌀까지 빼앗았습니다. 이곳에 올 때 입고 있었던 의복만이 우리가 가진 모든 옷가지였습니다. …
저는 영어를 배우고자 홀로 도쿄에 남았습니다. 지난 36년간 우리는 일본의 통치하에 있었고 심지어 생사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들은 우리에게 일본법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 같습니다. 일인들은 미국 신문기자에게 모든 암시장은 조선인이 도맡고 있으며 그들이 있는 한 일본의 민주화는 달성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비난은 근거가 없고, 순전한 거짓말입니다. 암시장의 유혹을 받는 한국인이 없다곤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우리 모두가 암시장 상인이라고 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이종민, 1946.5.)
제주도 출신으로 추정되는 이 청년은 징용으로 끌려온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다른 징용자들은 모두 돌아가고 ‘영어를 배우고자’ 홀로 도쿄에 남았다. 해방된 조선 사회가 식견 넓은 청년들을 필요로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앞날을 준비하기 위해 도쿄에 남은 이 젊은이의 열정이 그저 가상할 따름이다. 그러나 ‘미군이 진정한 인류 평화를 보장하는 것을 보며 무척 기뻤고, 미군의 도착을 환영했던’ 이 젊은이는 이제 맥아더 장군에게 ‘조선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정책을 개선시켜주실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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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물자 부족으로 서울에서도 암시장이 성행했다. 1947년 5월 미 점령군이 서울 명동의 한 암거래상을 급습해 압수한 담배와 시계, 골프채 등 각종 미제 상품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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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성찰 대신에 조선인 탓
미국의 대표적 일본현대사가인 존 다워는 항복 직후 일본 정부의 군사 자금, 군수 물자의 대량 방출, 정부 관료와 결탁한 군수업자, 군인·군속, 관리의 발호와 부정·부패 등이 암시장의 온상이었음을 지적하고, 패전 직후 경제 혼란과 위기는 이러한 일본 정부, 군부의 부정·부패와 일본 정부·점령당국의 경제정책의 실패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암시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물자의 공급과 시장의 관리다. 암시장에 공급된 물품은 주로 곡물, 해산물 등 식량과 식품, 이전의 군용물자였고, 점령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품도 일부 있었다. 시장의 관리는 대부분 경찰의 묵인과 방조하에 ‘야쿠자 구미’에 의해 이루어졌다. 암시장에는 ‘제3국인’도 참여했는데 왜냐하면 그들도 먹고살아야 했기 때문이었고, 암시장은 전전부터 이어진 그들의 존재 방식과도 연결되었다. 전전 조선인 자영업자 또는 소상인 가운데 많은 이가 고물상을 했다. 고물상은 별다른 자본 없이 조선인이 진출할 수 있는 직업군 가운데 하나였다.
암시장이 일본인들의 생활양식의 일부로 자리 잡으면서 그 내부에 나름의 직업윤리가 만들어졌고, 일본인과 제3국인들 사이의 갈등도 오히려 적었음을 지적하는 연구도 있지만 ‘자유시장’의 정글 같은 성격은 일본인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상호부조하는 가족공동체라는 의식을 믿도록 교화되었던 일본인들에게 그 환상을 깨트리는 충격요법과 같았다. 일본인, 3국인 할 것 없이 전후 일본에 거주한 모든 사람이 암시장에 참여했고, 많은 일본인에게 암시장이 경제 그 자체였다면 조선인의 암시장 참여나 조선인의 참여 빈도가 그리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도 그 일부로서 암시장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것이 가진 긍정성, 부정성을 모두 용인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인들에게 그 부정성을 전가하고 도덕적으로 비난하기 손쉬운 대상이 조선인이었다는 점이다. 일본 사회는 조선인의 존재 자체를 식량난과 같은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골칫덩어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패전 직후 일본 사회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인식은 전후 일본인의 자기인식과 타자인식을 형성하는 데 구체적 계기를 제공했으나, 일본 사회는 과거사 정리와 미래지향적 관계 설정에 필요한 성찰의 기회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였다.
▶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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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일본에 들어온 직후에는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전범, 암시장을 관리하는 경찰 등 고위층의 부패를 고발하는 편지도 더러 있었다. 하루다 데쓰오가 1946년 1월 미군 사령부에 보낸 편지 내용을 요약 번역한 미군 보고서. 정용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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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다 테츠오의 편지 원문 중 일부. 정용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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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고쿠슈가 1946년 1월에 보낸 편지는 일본의 물가폭등과 암시장의 원인이 경찰관임을 지적하고 있다. 정용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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