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08 20:19
수정 : 2019.05.08 20:23
짱변의 슬기로운 소송 생활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A씨. 옆 테이블에 있던 B씨가 술병을 휘두르며 다가와 시비를 걸고 위협하자, A씨는 친구들과 함께 B씨를 제압하고 그의 손에 있던 술병을 뺏어 B씨의 머리를 가격했다. B씨의 머리에서 새빨간 피가 흘렀고, 곧이어 출동한 경찰관이 A씨와 친구들을 경찰서로 연행했다. A씨와 친구들은 B가 먼저 위협해서 정당방위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미 예상했겠지만, A씨와 친구들에게는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법은 정당방위를 매우 제한적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정당방위가 인정되려면 아주 소극적인 방어를 하는 데 그쳐야 한다. 방어하려다가 너무 세게 때리거나, 욱하는 마음에 보복성 공격을 해버리면 정당방위는커녕 쌍방폭행이 되기 십상이다.
A씨가 어떻게 하면 정당방위가 되는 걸까? B씨가 술병을 잡은 팔을 들어 올려 A씨를 향해 내려치려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B씨의 팔을 쳐서 병을 떨어뜨리거나, B씨의 몸을 밀쳐내는 정도라면 정당방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위 사례처럼 A씨가 술병으로 B씨의 머리를 가격한 경우 오히려 A씨가 가해자로 처벌받을 확률이 높다.
상대방이 아직 때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맞을 것이 분명할 때, 이른바 ‘선빵’을 날려서 위험을 피하는 것은 어떨까. 이와 관련해서 아주 유명한 사건인 ‘김보은·김진관 사건’이 있다.
김씨는 9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재혼으로 계부 김영오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부는 겨우 9살이었던 김씨를 성추행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김씨가 12살이 되던 무렵 강간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김씨가 대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거의 매일같이 같은 일이 반복되었고, 그렇게 김씨는 대학생이 되었다. 김씨는 대학교에서 남자친구 김진관을 만나게 되었고, 남자친구에게 계부로부터 당한 강간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후 김씨와 남자친구는 계부의 강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술에 취해 자고 있던 계부를 식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1992년 발생한 이 사건은 당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고, 김씨와 남자친구의 무죄를 끌어내기 위해 무려 22명의 변호인단이 나섰다. 변호인단은, 김씨가 12살 때부터 사건 발생 얼마 전까지도 계부로부터 강간을 당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강간 피해를 볼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정당방위로 계부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미리’, 그리고 ‘어느 정도로’ 방어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되었다.
하지만 변호인단의 정당방위 주장은 절반만 인정되어 결국 김씨에겐 유죄가 선고되었다. 법원은 계부가 강간하기 전에 ‘먼저’ 방어하는 것도 정당방위가 될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런 경우에도 ‘지나친’ 방어를 하면 정당방위가 될 수 없다면서, 강간에 살인으로 맞선 것은 지나친 방어여서 정당방위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김씨에게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직접 식칼로 찌른 남자친구에게는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살인죄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로, 김씨는 살인죄에서 가장 낮은 형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정당방위의 핵심은 과하지 않게 방어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내 신체가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적절한 방어의 범위가 너무 좁은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장영인(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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