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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국의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
행복했던 순간 떠올려 보니
연애하며 상대에게 질문이 많았던 때
한국, 질문·반문하기 어려운 구조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
질문 잘하는 이 많아야 사회 행복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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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친구 참 삐딱해.”
‘삐딱’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관계가 매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퍼즐 조각 맞출 때 아귀가 딱딱 맞아야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채워야 할 공간에 맞는 모양으로 주무르기 쉽게 물컹해야 한다. 고분고분해야 한다. 딱딱하게 모난 돌은 끼워 넣기 힘들다. 어디에 포섭되지 않는다. 묻어가지 않는다. 비탈에서 홀로 서 있다. 눈에 띈다. 아니, 튄다. 결국 정 맞는다. 관계 역시 그러하다. 모난 돌, 내 편이 아닌 돌, 내 말에 순응하지 않는 돌, 물 흐르듯 스며들지 않는 돌은 외톨이가 된다.
인간은 언제 행복한가. 궁금해서 못 견딜 때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꼽으라면 연애 기간이다. 연애 감정이란 실은 궁금증이다. 연애 시절을 떠올려 보라. 사귀는 상대가 나를 좋아할까,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내가 청혼하면 받아줄까. 모든 것이 궁금하다. 데이트하고 헤어지면 조금 전까지 같이 있던 그 사람이 지금은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전화하고 문자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다시 그 집 앞으로 달려가고, 그런 시간을 도저히 감당 못 해 결혼한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면 어떤가. 꼴도 보기 싫지 않던가. 눈앞에서 알짱알짱하지 않는 게 고맙지 않던가. 그때 궁금해지면 병이다. ‘출장 간다고 했는데 정말 갔는지.’ 의심하면 질환이다. 물론 내 얘기는 아니다. 나는 지금도 아내가 그립다. 여전히 궁금하다. 늘 이선희의 노래 ‘알고 싶어요’를 웅얼거린다.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가장 궁금한 건 그녀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지이다. 그녀가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술상도 치워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 한다. 그녀가 지시한 일을 해놓아야 한다. 그래도 그 시간이 가슴 떨리게 무섭고 행복하다.
연애할 때 말고 행복한 시절은 또 있다. 바로 어린 시절이다. 왜 행복한가. 어린아이가 어른보다 모르는 게 많아서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는 모든 게 신기하다. 이것은 무엇인지, 왜 그런지, 오늘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다. 하루하루가 새롭다. 그래서 엄마에게 묻는다. 학교에 가선 선생님께 질문한다. 그것이 본성이다. 왜 알고 싶어 하나. 알아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가야 먹을거리가 있는지, 어딜 가면 위험한지 알아야 살아남는다. 알았을 때 안전하다. 그래서 알고 싶고, 알았을 때 행복하다. 어쩌면 인간의 호기심은 그런 이유 때문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나는 질문 못 하는 사람이다. 최근 어쭙잖게 라디오 진행을 시작했지만,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진행자는 청취자 입장에서 궁금한 걸 물어야 한다. 방송국 프로듀서는 나의 연설비서관 경력을 높이 샀다. 대통령 글을 쓰려면 궁금한 걸 대통령께 물어야 하고, 국민이 궁금해하는 내용을 써야 하니 질문 하나는 잘할 것으로 믿고 있다. 착각이다. 나는 받아쓰는 사람이었다. 묻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통령 말귀를 알아듣고 대통령의 생각을 읽는 사람이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기자들, 질문하는 것이 본업인 기자들도 묻지 않았다.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가 끝나고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개최국인 한국 기자들에게만 질문 기회를 줬지만, 끝내 질문하지 않았다. 한국말로 해도 된다고 했지만 끝까지 버텼다. 어디 기자뿐인가. 삼성전자, 현대차에 가도, 공무원 조직에 가도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하지 않는 것은 학습이 잘된 결과다. 우리 사회는 궁금해지면 위험하다. 어렸을 적 엄마에게 주야장천 묻는다. 그러다 혼난다. 특히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엄마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다 한 대 맞는다. “시끄러워. 사람들 많은 데서 그러는 것 아냐!” 학교에 들어가면 더욱 본격화된다. 모르는 것을 물으면 그것도 모르냐고, 무슨 그리 허접한 질문을 하느냐고 타박한다. 그래서 아는 사람만 묻는다. 선생님이 ‘질문 있나?’ 하면 모르는 아이들은 묻지 않는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묻는다. 학창시절 내내 그랬다. 학교에 왜 가는가. 알려고 가는 것 아닌가. 알려면 모르는 건 물어야 하지 않는가. 질문은 학교 가는 이유이고 학생의 권리 아닌가.
이스라엘에 간 적이 있다. 질문하지 않는 학생은 선생님이 상담한다고 한다. 왜 그러는지 물었더니, ‘그런 친구는 아예 모르거나 학습 의욕이 없기 때문인데, 학생에게 이보다 더 큰 문제가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0.2%도 안 되는 인구로 25% 가까운 노벨상을 휩쓰는 이유가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는 ‘하브루타’ 학습과 당돌하고 뻔뻔하게 묻는 ‘후츠파’ 정신에 있다고 한다.
모르는 것을 들킬 때만 위험한 게 아니다. ‘그게 맞나?’ ‘저래도 되나?’ 의문이 들 때도 위험하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참고서를 소개했다. 우리 반 친구 중에 누군가 물었다. “선생님, 그 책 사라는 말씀이신가요?” “이리 나와. 누굴 책장사로 알아?” 그 친구 한 시간 내내 맞았다. 학교뿐 아니다. 직장에서도 고개를 갸우뚱하면 안 된다. 상사 생각에 의문을 품거나 의심하는 사람은 충성심이 부족한 사람이 된다. 대차게 끄덕여야 한다. 리액션이 좋아야 한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기에 그렇게 고명한 생각을 하실 수 있느냐’고 감탄을 금치 못해야 한다. 당신의 말씀 단 한 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불퇴전의 각오로 받아 적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우아하게 차려입고 청와대 상춘재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대통령 옆에 포진해 있는 기자는 어찌 그리 리액션이 좋은지. 대통령은 착각했을 법도 하다. 기자들 반응으로 봐선 모든 게 완벽하게 해명됐다고. 이뿐인가.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종범실록’은 또 어떤가. 대법원장을 옥에 가두는 결정적 증거도 깨알같이 받아쓴 수첩이었다지 않은가.
받아 적는 게 장땡이다. 밑줄 쫙쫙 긋고 번호 매기고 별표치고 ‘야마’ 잘 잡고 상사 의중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분위기와 흐름을 잘 읽어야 한다. 묻는 건 하수다. 행간을 읽고 빈칸을 채워줘야 중수는 되고, 시키지 않은 짓도 잘해야 고수다. 그래야 출세한다.
글쓰기를 힘들어하는 이유도 질문하기를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우리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글쓰기는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게 언제였지?’ ‘누구였더라?’ ‘이것에 관한 내 생각은 뭐지?’ 물을 수 있으면 쓸 수 있다. 회사에서 쓰는 보고서는 내가 아는 것,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게 아니다. 상사가 궁금해하는 것, 알고 싶어 하는 것에 답하는 것이다. 하물며 일기도 ‘오늘 내가 뭘 했지’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이명박 당선인이 정부 조직개편안을 발표하자, 쉰한 가지 질문으로만
연설문
을 작성했다. 첫 문장을 질문으로 시작해보라. 마무리로 질문을 던지며 끝내보라. 질문 100가지를 할 수 있으면 책을 쓸 수 있다. 답을 몰라 못 쓰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못 해 못 쓰는 것이다.
대답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도 잘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받아 적는 사람이 아니라 의문을 품고 반문하는 사람,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문제의식을 갖고 이의 제기하는 사람, 문제를 풀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 내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 사회는 한 단계 더 도약하고 구성원 역시 행복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따로 있다고요?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강원국(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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