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국의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
보라는 데만 봐야 했던 과거
글은 자신의 관점이자 해석
글감인 관찰 대상, 보는 이가 골라야
직장 글엔 5단계가 있어
날것 그대로 쓰는 게 좋아
억울함·외로움 벗어나게 해주는 내 편
“여기 주목!”
학창시절,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에게 듣던 일성이다. 이래도 반응이 없으면 “눈 감아” 혹은 “합죽이가 됩시다. 합!” 눈에 뵈는 게 없으면 조용해진다. 그리고 “눈 떠.” 다시 “여기 주목.” 이때도 정신 못 차리고 창밖을 보고 있는 친구에겐 여지없이 분필이 날아갔다. 때로는 칠판지우개, 아니면 “너 이리 나와.”
교련 선생님이 나를 부르는 줄 몰랐다.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불려 나갔다. “복창해라. 나는 엄마가 둘이다.” 뭔 말이지? 의아해하는 내게 선생님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너는 딴 데를 봤으니 엄마가 둘인 녀석이다. ‘나는 엄마가 둘이다’라고 소리쳐라.” 밑도 끝도 없다. 하라니 목이 터지라 외쳤다. “나는 엄마가 둘이다.”
우리 세대는 보라는 데를 잘 봐야 했다. 그러면 우등생 소릴 들었다. 그런 사람이 사회 나와서도 잘 베끼고 잘 쫓아갔다. 우리는 너무 늦게 산업화를 시작했기에 앞서가는 것을 빠른 속도로 따라잡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주의가 산만해선 안 된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한 다. 집중력이 경쟁력이다. 일사불란과 혼연일체가 미덕이다. 한눈파는 건 반동이다. 보고 싶은 데를 봐서도 안 된다. 봐야 할 곳, 보라는 데를 봐야 한다. 그것이 시대적 소명처럼 여겨졌다.
학교에선 선생님 말씀 잘 듣기 경쟁이었다.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으로 평가받지 않았다. 나 역시 선생님을 뚫어지라 보고 열심히 받아 적는 사람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사회에 나가서도 상사가 가리키는 데를 보고, 시키는 일을 잘한다. 경주마처럼 옆을 가리고 정해진 트랙을 따라, 조직이 가리키는 목표를 향해 질주한다. 그리고 출세한다.
본시 인간은 보는 것을 좋아한다. 사주 경계를 잘한 인간이 살아남았다. 먹을거리도 잘 발견했다.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인간은 잡아먹히거나 굶어 죽었다. 남아 있는 인간은 보는 걸 좋아할 수밖에. 특히 우리 민족은 불구경, 싸움 구경, 장터 구경... 보는 것을 좋아한다.
보는 것, 즉 관찰은 보는 주체가 보는 대상을 선택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지 않을 때 보는 것은 재미없다. 재미없는 이유는 불일치이다.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 누군가 가리키는 방향이 일치하지 않을 때 갈등한다. 누구에게나 신념, 가치관이란 게 있고, 나름의 문제 해결 방식과 고유의 행동 패턴이 있다. 이런 것이 뭉뚱그려 내가 보는 방향이다. 이런 방향이 상사나 조직, 부모님의 그것과 다르고, 다른 것을 좇고 따라야 할 때 재미없다.
따라가는 과정에서의 부조화도 재미없는 이유다. 서로 다른 것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은 불가피한데, 일방적이기까지 하다면 고통스럽다. 조직에서 상사가 요구한 내용을 써서 가져가면 ‘이렇게 고쳐라’ ‘다시 써라’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냐’’라고 듣는 나도 할 말이 없지 않다. ‘자기는 정답 알아?’ ‘자기 생각이 정답이야?’ 속에서 열불이 나고, 불화가 계속된다.
나아가 조직이나 상사의 생각이란 게 일관성도 없다. 아니, 없는 게 당연하다. 상사가 처음부터 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답을 찾아가는 암중모색 과정이 조직에서 하는 ‘일’이란 것이다. 내겐 글쓰기가 그 일이다. 비일관성은 일의 본질이다. 일관되지 않은 생각을 통해 일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게 조직에서 글쓰기다. 상사는 부하직원이 써온 초안을 보고 새로운 생각이 난다. 처음 지시할 때 생각보다 발전된 것이거나 다른 생각이다. 처음 말한 그것과 일관되지 않다. 이는 한 사람의 상사에 머물지 않는다. 층층이 위로 올라가면서 좌충우돌한다. 부서장 생각 다르고 임원 생각 다르다. 결코 일관되지 않다. 당하는 사람은 기분 좋을 리 없다. ‘왜 이리 오락가락하는 거야’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 거지?’ 스트레스 한가득하다.
조직이나 상사도 남는 장사가 아니다. 구성원들은 “됐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일의 목표다. 상사가 80점짜리라면 80점에서 일이 멈춘다. 90점, 100점, 1000점을 넘보지 않는다. 크디큰 몸집의 코끼리가 서커스단을 따라다니듯 상사가 가리키는 방향만 본다. 그 지점에 이르면 일이 끝난다. 더는 없다. 처음에는 도망가려고 발버둥 쳤던 코끼리가, 그것이 부질없는 몸부림이란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말뚝을 뽑을 수 있는 힘을 가진 뒤에도 도망가지 않는 것과 같다.
무기력을 학습한 결과, 손해 보는 것은 조직과 상사다. 상사는 자기 점수 이상의 결과물을 얻어내지 못한다. 기껏해야 본전치기다. 조직도 상사 점수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다. 상사가 자기 점수 이상의 생각을 못 하도록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상사가 보는 방향과 다른 곳을 보는 사람이 있어야 상사를 보완할 수 있고, 상사가 놓친 것을 챙길 수 있으며, 서로 다른 게 섞여 새로운 것도 만들어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직장에서 글을 써보니, 보는 수준에는 다섯 단계가 있더라. 첫 단계는 상사가 말한 것만 보고 그것대로만 쓰는 사람. 두 번째 단계는 상사가 말한 내용의 빈칸, 즉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사람. 세 번째는 상사가 말한 것의 뒤편, 즉 의중을 읽고 글을 써오는 사람. 네 번째는 상사의 말과 겨루면서 자기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 마지막 다섯 단계는 상사의 말을 보지 않고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상사의 말을 받아 적지 않는다. 자기 생각을 한다. 그런 사람의 직장 생활은 즐겁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조직에도 대박을 안겨준다.
보고 싶은 데를 보자. 글은 나의 시선이고 관점이며 해석이다. 길들지 않은 나의 날것을 글로 쓰자. 보는 방식은 다양하다. 깊게 들여다보면 본질, 원리를 알게 된다. 이런 글은 주제로 직행한다. 단도직입적으로 ‘~은 무엇이다’라고 규정한다. 멀리 내다보면 예상, 전망, 예측이 담긴 글을 쓰고, 넓게 보면 동서고금을 넘나들게 되며, 오래 보면 그것을 보듬고 사랑하게 된다. 고정관념, 통념, 상식을 뒤집어 보면 통찰이 나올 수 있고, 남과 다르게 보면 다른 시각으로 쓸 수 있다. 꼼꼼하게 보면 놓치는 것이 없고, 구조적으로 보면 전체를 조망하는 글이 가능하다. 자세히 보면 묘사를 잘하게 되고, 보이지 않은 걸 보면 상상력이 풍부한 글을 쓴다. 낯설게 보면 직관이, 헤아려 보면 감성이 글에 가미된다. 나를 보면 성찰하는 글이 나온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다각도로 보려고 했다. 그렇게 본 결과를 첫째, 둘째, 셋째로 정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과관계를 따져서 보려고 했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 일이 일어난 이유와 원인을 따져 들어가고, 그 일이 미칠 영향과 파장을 꼬리를 물고 따져본 후 글을 썼다.
나는 기웃거려 본다. 당사자로서 정색하고 보면 오히려 생각이 안 난다. 장기 훈수 두듯 비켜서 넌지시 본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방관자로 본다. 회사에서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도 평소 좋은 의견을 많이 내는 동료를 봤다. 그는 또 이런 주제에 어떤 의견을 낼지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게 있다. 지금도 글을 쓸 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을 생각해본다. 그는 내 의견에 어떤 반론을 할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반론에 재반론한다.
내가 보고 싶은 데를 보고 쓰면 정신 건강에도 좋다. 우리 뇌는 생각과 행동, 감정과 표현의 불일치 때문에 힘들다. 하지만 내 글 속에서는 모든 게 일치한다. 내가 가장 나답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심정과 처지를 알아줌으로써 억울함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래서 글은 언제나 내 편이고 나를 치유한다.
강원국(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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