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제네바 합의’ 경수로 지원 약속
미국 불이행에 북 ‘고난의 행군’ 시작
그무렵 방북…탁아소 아사 현장에 충격
1998년 김정일 ‘선군정치’ 본격 나서
미 경제제재 더 강화 국제사회도 가세
“정통성 기반 북체제 이해 못한 실패책”
유니세프 ‘북 아동 6만명 아사 위기’ 보고
핵은 미실행 위협…제재는 생존권 문제
“식량무기가 핵무기보다 더 잔인하다”
북-미 서로 다른 ‘인권 개념’ 이해 필요
2차대전 승전국 잣대인 ‘세계인권헌장’
‘인류 보편적 가치’ 표방하지만 배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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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를 통해 한반도는 전쟁의 위기를 넘겼으나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을 이겨내고자 ‘고난의 행군’에 돌입했다. 90년대 중반 북한의 탁아소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던 박한식 교수는 “북의 인권 문제를 구실로 삼은 미국의 경제제재 탓에 어린이들의 정작 기본 인권인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는 모순”을 지적한다. ‘고난의 행군’ 시기 영양실조 상태로 보이는 북한 탁아소의 아이들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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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체결된 ‘제네바 합의’에서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동결 대가로 북한에 1000MWe급 경수로 2기를 제공하고, 경수로 완공 때까지 연간 중유 50만t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의 약속 불이행은 북한의 에너지 상황을 크게 악화시켰다. 그리고 그 여파는 1990년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로 그대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약속 불이행은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를 악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이 겪은 참상은 약 200만명의 북한 인민이 굶어 죽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때마다 목에 붉은 띠를 두른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이 군가를 부르며 행군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배고픔을 강인한 정신력으로 견디기 위한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었던 것이다.
1998년 김정일은 이른바 ‘선군정치’(Military-First Politics)를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그러자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는 더욱 강화되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많은 나라들도 미국의 정책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의 경제제재에 굴복해서 미국의 뜻에 순순히 따를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북한은 정치체제의 ‘정통성’(legitimacy)의 기반을 경제적 부가 아니라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경제제재를 통해서 북한의 경제적 기반이 훼손되더라도 주체사상이라는 정통성의 기반은 거의 훼손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미국이 대북 경제제재를 통해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이 지금까지 실패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경제제재를 지속적으로 강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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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김정일은 경제난 돌파와 체제 강화를 위해 ‘선군정치’를 본격 시행하고 나섰다. 2010년 8월2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선군혁명영도 시작 50주년 기념 선군절’도 제정했다. 사진은 2005년 선군정치연구소조의 선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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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식량무기가 핵무기보다 더욱 잔인한 무기”라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국제정치학에서 핵무기는 전쟁 수단이 아니라 외교적 협상 수단으로 이해한다. 핵무기의 엄청난 파괴 능력이 오히려 실제 사용을 제한하는 역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사용하는 식량무기는 매일 먹어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인간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실제로 1990년대 미국이 주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이라크 경제제재는 13년간 지속되었는데, 그로 인해 5살 미만의 어린이 약 50만명이 굶어 죽었다. 또한 2018년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의 한 조사보고서를 보면 미국 주도의 대북 경제제재로 약 6만명의 어린이가 굶어 죽을 지경에 처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부모는 이미 굶어 죽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실제 희생자는 6만명을 훨씬 넘어설 수밖에 없다.
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의 한 탁아소를 방문했다가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 나를 안내하는 북한 관리들에게 이들의 부모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모두 죽었다고 답해 주었다. 생각해 보라. 굶어 죽어가는 자식을 둔 부모는 자신이 굶어 죽는 그 순간까지 마지막 남은 음식을 자식에게 모두 주지 않겠는가? 그때 탁아소에서 굶어 죽어가던 어린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이라고 믿는다. 나는 북한 관리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왔지만 참담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죽어가는 아이들의 처참한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방문을 조용히 걸어 잠갔다. 이어서 나보다 키가 두배 가까이 큰 북한 관리들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키가 작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나보다 키가 작은 사람을 딱 2명 봤는데, 박정희와 덩샤오핑(등소평)이 그들이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그들의 얼굴을 쏘아보면서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쳤다. 그들의 안경이 땅에 떨어졌다. 나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너희들 ‘배때기’는 이렇게 멀쩡한데,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탁아소의 아이들이 저렇게 죽어가느냐!” 그러자 북한 관리들이 곧바로 나를 부둥켜안았다. 우리는 다 함께 방바닥에 쓰러져 흐느껴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서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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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북-미 2차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왼쪽) 대통령은 김정은(오른쪽) 국무위원장의 ‘경제제재 일부 해제’ 요구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2월28일 하노이의 메트로폴 호텔에서 열린 이틀째 확대회담의 결렬 직전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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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은 지난 2월28일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미국에 ‘유엔 제재의 일부, 즉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의 해제’를 요구했다. 김정은의 요구는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인민의 실상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김정은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미국 의회에서는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의 결렬을 환영하면서 북한의 인권 탄압 등의 이유로 경제제재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의 경제제재로 6만명에 이르는 북한의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미국이 그토록 강변하는 ‘인권’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가?
나는 조지아대학에 재직하면서 수십년에 걸쳐 인권 문제를 연구했다. 대학원에 인권 과목을 개설해서 수십년간 강의를 했고, 1995년부터 ‘국제문제연구소’(Center for the Study of Global Issues, GLOBIS)를 만들어 강의실 밖의 인권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인권을 외교정책의 의제에 포함시킨 지미 카터와 수십년에 걸쳐 인권 문제를 토론하면서 나름의 인권 개념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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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1995년 조지아대학에서 ‘국제문제연구소’(GLOBIS)를 세워 ‘북한 포럼’을 여는 한편 강의실 밖 인권 문제 연구와 해결 방안을 주도적으로 모색해왔다. 조지아대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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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부한 시각에서 보면 미국의 ‘인권 개념’에는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국가들의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인류 보편의 가치가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승전국의 제한된 시각을 반영한 특수한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또한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북한도 북 나름의 인권 개념을 보유하고 있다. 내가 볼 때, 미국과 북한의 인권 개념은 각각 장단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인권은 미국이 독점한 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볼 때 인권은 크게 3가지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첫째, 천부권(universalism)이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면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미국에는 인권이 있고, 북한에는 인권이 없다는 식의 얘기는 성립할 수 없다. 둘째, 양도 불가능성(inalienability)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권리로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셋째, 공동 책임성(entitlement)이다. 예컨대 평양에서 아이가 굶고 있으면 아이의 책임이 아니라 나의 책임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또한 나는 천부권, 양도 불가능성, 공동 책임성에 기초를 둔 인권은 크게 6가지 차원으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첫째, 생존권(life right)이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할 권리로서 인권에서 가장 중요한 차원을 차지한다. 둘째, 귀속권(belonging right)이다. 인간이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삶을 영위할 권리다. 셋째, 평등권(equality right)이다. 인간이 어떤 이유로도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다. 넷째, 선택권(choice-making right)이다.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가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다. 다섯째, 사랑권(love right)이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예컨대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가정에 소속되어 있다. 가정의 권위를 생각하면 중매결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의 권리는 부모가 결정할 수 없다. 그래서 바로 그 남자와 여자에게 소중한 권리다. 또한 이산가족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권리도 사랑권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섯째, 해방권(liberation right)이다. 인간이 시간과 공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종교적 해방 내지 해탈을 의미한다. 인권은 이상의 6가지 차원을 모두 충족할 때 완전히 실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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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의 인권 개념은 1948년 12월10일 유엔에서 발표한 ‘세계인권헌장’에 담겨 있다. 박한식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잣대를 북한에 적용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유엔의 1950년 세계인권헌장 제정 2돌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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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인류 보편의 가치로 강변하는 인권 개념의 구체적 모습은 1948년에 제정한 ‘세계인권선언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에서는 모든 인간의 천부적 자유(free)와 평등(equal)을 동시에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는 자본주의의 키워드이고, 평등은 사회주의의 키워드이다. 따라서 양자는 이론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그런데도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에서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규정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의 욕망을 동시에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자본주의 국가 미국의 자유와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평등을 단순히 병치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역설하는 인권 개념은 인류 보편의 가치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미국의 인권 개념은 내가 분류한 인권의 6가지 차원 중에서 ‘선택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면서 구성되었다. 미국이 중시하는 선택권이란 결국 정치적 자유를 의미하며, 그런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민주주의 체제를 요구한다. 그러나 미국의 인권 개념은 내가 분류한 인권의 6가지 차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권’을 경시하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미국이 자국의 가혹한 경제제재로 수많은 북한 어린이들이 굶어 죽을 처지라는 명백한 사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북한의 인권을 끊임없이 비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요컨대 미국은 경제제재를 통해서 북한 인민의 생존권이라는 인권을 무자비하게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선택한 북한은 국가의 주권을 개인의 인권보다 우선시한다. 국가의 주권이 보장되어야만 개인의 인권 또한 보장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의 인권 개념은 미국의 인권 개념에서 강조하는 ‘선택권’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인권 개념은 내가 분류한 인권의 6가지 차원에서 ‘생존권’ ‘귀속권’ ‘평등권’을 대단히 중시하는 방향에서 구성되었는데, 이 3가지 권리는 모두 미국의 인권 개념에서는 취약한 양상을 보인다.
위와 같은 분석에 따른다면, 미국이 신봉하는 인권 개념과 북한이 신봉하는 인권 개념은 모두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이 신봉하는 인권 개념으로 북한을 아무리 강력하게 비판한다손 치더라도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다. 북한은 미국과 전혀 다른 인권 개념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아랍권의 이슬람교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 비판이 아랍권에 먹힐 수 있겠는가?
미국이 북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토록 장기간 노력했는데도 지금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궁극적 까닭은 미국이 당연시하는 ‘사유양식’(modes of thought)에서 자리하고 있었다. 미국은 자국에 친숙한 인권 개념으로 북한을 규탄하면서 경제제재를 강제하면 북한이 굴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런 기대는 지금까지 실현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악마로 간주하면서 끝없이 압박하고 위협하는 대신, 그래서 수없이 많은 북한 인민을 ‘생지옥’으로 몰아넣는 대신, 미국한테 친숙한 사유양식 그 자체를 혁신하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한다. 그래서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책을 새롭게 입안해서 실천해야만 할 것이다. 미국이 굶어 죽기 직전에 있는 북한 어린이의 ‘인권’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말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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