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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24 03:06 수정 : 2019.09.24 09:46

길을 찾아서 14회-한국 행태주의와 한반도 냉전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붕괴 이후 30년
남북한만 여전히 ‘안보 패러다임’ 갇혀

미국보다 더 만연한 한국 행태주의 ‘절망’
논문 질보다 양으로 학자 능력 평가…
“정신까지 지배하는 인식론적 제국주의”

북한 연구방법도 미국식 실패 답습
‘탈북자 증언·면담’ 1차 자료 의존
여행자 방북 몇차례로 ‘전문가’ 대접
“객관성 없는 데이터 북한 실상 왜곡”

햇볕정책 바탕에도 행태주의 인식
‘서구적 잣대로 북한 비정상국가로’

베트남전쟁 방식 군비경쟁은 ‘필패’
평양 지하철부터 방공호로 요새화

길을 찾아서 14회-한국 행태주의와 한반도 냉전

박한식(오른쪽) 교수는 1990년대 후반 김대중(왼쪽) 대통령 재임 시절 청와대를 여러 차례 방문해 햇볕정책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햇볕정책 역시 비정상국가인 북한을 정상국가로 바꿀 수 있다는 행태주의적 인식에서 출발한 까닭에 결과적으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사진 박한식 제공
세계적 차원의 냉전은 종식되었지만 한반도 냉전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냉전은 공포·불안·불신 등을 조장하면서 군비경쟁이 불가피한 ‘안보 패러다임’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1980년대 말 소련이 붕괴되면서 냉전이 종식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리 또한 한반도 냉전도 조만간 종식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지금까지 실현되지 않았다. 나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삶을 옥죄는 ‘안보 패러다임’이 유독 한반도에서 그토록 강고하게 지속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한국에 이식된 행태주의적 사고방식도 한반도 냉전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판단한다.

나는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중에 각종 정치제도를 암기시키는 교육방식에 커다란 실망을 느꼈다. 그런데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가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더욱 커다란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수입한 행태주의가 미국보다 더욱 번창해 있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 학계에서는 개별 논문의 질을 따지기보다는 논문의 출판 편수를 양적으로 측정해서 학자의 능력을 평가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행태주의적 사고방식을 액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나는 조지아대학 재직 시절 교수회의에서 종종 이렇게 주장했다. “막스 베버라는 걸출한 사회학자도 만약 40대에 조지아대학의 ‘테뉴어’(종신교수)를 신청했다면 분명 탈락했을 것이다. 베버는 논문의 양이 아니라 논문의 질이 우수한 학자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행태주의는 철학적으로 파산했지만 한국 학자들을 매개로 한국의 정신세계에 강매되었다. 나는 그런 현상을 ‘인식론적 제국주의’(epistemic imperialism)라고 부른다. 행태주의가 한국 정신세계에 침투해서 ‘지적 식민지’(intellectual colony)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냉전은 바로 그 식민지에서 풍요롭게 서식하는 악성 종양 중 하나인 셈이다.

한반도 냉전의 한복판에 ‘북한’이 존재한다. 북한이 한반도 냉전의 원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한반도 냉전의 거의 모든 양상이 북한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야기된다는 뜻이다. 소련이 붕괴하자 소련에 의존하고 있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도 줄줄이 붕괴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소련에 완전히 장악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건재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 냉전이 지속되는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한국 학계의 북한 연구방법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한국의 북한 연구는 미국의 행태주의적 냉전 연구와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미국에서 소련 내부를 관찰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북한 내부를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미국 사회과학자들이 소련을 ‘블랙박스’로 간주하고, 그것의 투입과 산출을 관찰해서 블랙박스 내부의 역학을 추론하고자 했는데, 한국의 북한 연구자들 역시 유사한 방식을 따르고 있다. 북한을 단편적으로 관찰한 데이터나 탈북자 면담 내용 등을 1차 자료로 간주해서 북한 내부의 역학을 추론하는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행태주의적 냉전 연구가 실패했던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한국의 행태주의적 북한 연구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한식 교수는 북한에서 군용 트럭으로 남쪽의 인도주의적 지원 쌀을 운송하는 위성사진만으로 군량미 전용의 증거로 비난하는 식의 표피적 보도를 북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2006년 한 시사주간지 보도 사진.
2010년 북쪽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촬영된 것으로 일부 보수 매체에서 보도한 사진. 북이 인도적 지원 쌀을 군량미로 전용하고 있다는 증거로 종종 인용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가지 예를 들어 보자. 미국과 한국은 북한에 식량을 지원한 뒤 위성사진을 통해서 북한 군용트럭이 식량을 운송하는 모습을 확인한다. 그들은 그 사진을 근거로 북한 군대가 인민에게 전달되어야 할 식량을 탈취하고 있다고 성토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당연시하는 북한에 대한 불신을 더욱 강화시킨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확신은 북한의 실상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도출한 오판에 불과하다. 내가 북한에서 직접 확인하기로, 북한의 운송수단은 워낙 군용트럭밖에 없다. 또한 북한 군대는 독립채산제로 운영된다. 국외에 무기를 판매한 대금 등도 독자적으로 운용한다. 따라서 군량미는 늘 충분히 확보해 둘 수 있다. 혹여 외국에서 지원한 식량을 군대로 보내면 군에서는 오히려 군량미 풍족한데 왜 가져왔느냐고 반문하면서 군인 가족들에게 전달해 주라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군인 가족들의 불만이 쌓이고, 그 가족의 일원인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박한식 교수는 독립채산제인 북한군은 자체 재정으로 군량미를 구입해 비축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2019년 봄 두만강 인근에서 군량미를 트럭에 싣고 있는 북한군. <한겨레> 자료사진
탈북자의 증언 역시 객관적 데이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탈북자의 ‘존재론적 지위’ 그 자체가 북한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탈북’이라는 행위는 북한을 혐오하고 부정하는 가치판단을 명시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북한을 실존적으로 부정한 사람이 어찌 북한에 대해서 공정한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막스 베버는 “우리가 가치판단을 하는 순간 사실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중지된다”고 역설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나는 황장엽과 개인적 친분이 있어서 그의 망명 이전 북한에서부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를 통해서 직접 확인한 적도 있는데, 탈북자의 얘기는 대부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내지 국가정보원(국정원)의 각본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한국의 많은 북한 연구자들은 탈북자의 증언을 기초로 각종 학술서를 저술하고, 탈북자 자신 또한 북한에 대한 가치판단을 기초로 저술한 책을 출판해서 북한 문제 ‘최고의 전문가’로 행세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한국의 북한 연구자들에게 꼭 전달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바로 행태주의 그 자체의 본질적 결함이 그것이다. 행태주의는 반드시 측정 가능한 관찰 데이터가 있어야만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데이터를 아무리 많이 확보했다손 치더라도 북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성취할 수는 없다. 일찍이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수백만명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오직 뉴턴만이 그것을 보면서 역학관계의 수학적 도식(mathematical scheme)을 구상했다. 지금까지 수백만명이 사원과 교회에서 램프가 좌우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오직 갈릴레오만이 그것을 보면서 뉴턴과 유사한 수학적 도식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수백만명이 미국을 방문했고, 그 이상의 사람들이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미국 사회를 관찰하고서 <미국 민주주의>라는 불멸의 저서를 쓴 사람은 알렉시 드 토크빌과 같은 지적 통찰력과 개념적 사유능력을 소유한 이들뿐이었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불멸의 논문을 작성한 사람도 막스 베버와 같은 지적 통찰력과 개념적 사유능력을 소유한 학자뿐이었다. 무면허 의사가 환자의 환부에 청진기를 아무리 들이댄다 한들 병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뉴턴과 갈릴레오와 토크빌과 베버에 버금가는 지적 통찰력과 개념적 사유능력을 결여한 ‘무면허 의사들’이 북한을 방문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촬영한 다음, 남한에 돌아와 북한 전문가로 행세하고, 북한에 관한 책을 쓰고, 남한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북한에 대한 강의를 한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한마디로 학문에 대한 ‘모독’이다. 학문이란 최고급 수준의 전문 분야는 결코 그런 식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행위가 북한을 온갖 형태로 곡해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각종 편견을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포시킨다는 데 있다. 단언컨대 그런 편견이 바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강력하게 방해하는 원천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북한을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북한 전문가가 된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나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굴욕을 느낀다. 나의 북한 방문과 북한 이해를 동일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여행자는 출발하기 이전에 장비를 단단히 챙긴다. 나는 북한을 방문하기 이전에 나의 학문적 연구 경험과 독자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개발한 수많은 ‘이론적 명제들’(theoretical propositions)을 단단히 챙긴다. 예컨대 나는 “모든 정치체제는 정통성 위기에 봉착했을 때 붕괴의 위험에 처한다. 정통성의 요체는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이념적 가치와 정신이다”라는 이론적 명제를 세웠다. 북한에 가서는 나의 이론적 명제에 견주어 북한 사회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 북한이 경제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붕괴되지 않는 까닭을 구체적으로 확인한다. 나는 그런 관찰 이후 나의 이론적 명제가 옳고, 세계에서 통용되는 북한붕괴론이 틀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난해 한국에서 출간된 <선을 넘어 생각한다>의 제1장 ‘북한은 과연 붕괴할 것인가’는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집필된 것이다. 따라서 나의 북한 방문은 이론적 명제들을 경험적으로 검증하고, 수정하고, 보완하는 일련의 ‘참여관찰’이었다.

이른바 ‘햇볕정책’에도 행태주의적 사고방식이 진하게 녹아 있다. 물론 나는 햇볕정책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길을 개척하는 데 기여한 ‘위대한’ 업적을 모르지 않는다. 또한 나는 김대중과 수없이 만나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 등을 주제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나는 햇볕정책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한계를 발전적으로 극복하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고 본다. 햇볕정책에 깔려 있는 중요한 전제 중 하나는 북한이 ‘비정상국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과 평화적 교류와 협력을 강화해서 북한을 ‘정상국가’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햇볕정책에서 염두에 둔 정상국가란 미국이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민주주의적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였다. 그러나 햇볕정책에서 당연시한 그러한 전제는 궁극적으로 미국 행태주의의 여러 이론들, 예컨대 데이비드 이스턴의 정치체제론, 가브리엘 알몬드의 구조기능주의, 탤컷 파슨스의 근대화론 등에서 공유하는 ‘서구적 편견’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은 모두 경험적으로 실패했으며, 따라서 햇볕정책에서 소망하는 목적 또한 실현할 수 없었다. 햇볕정책을 통해서 북한의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를 전혀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냉전이 요지부동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는 한-미 동맹에 따라 연례적으로 수행되는 한-미 군사훈련, 남북한 군비경쟁, 북핵 문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를 지배하는 사고방식에도 행태주의가 깊이 스며들어 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전사자 수에 강박적으로 집착했다. 인간 대신 물질을 중시하는 행태주의적 사고방식을 따르다 보니 북베트남 전쟁 지휘부의 정치적 판단에 주목하는 대신 물질과 다를 게 없는 전사자를 헤아리는 일에 몰두했던 것이다. 미국은 전투 현장에서는 패배한 적이 없지만 베트남전쟁을 수단으로 미국이 추구하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박한식 교수는 ‘미국식 행태주의 전쟁관’에 따른 군비경쟁 끝에 한미연합군이 북한과 지상전을 벌인다 해도 베트남전쟁 때처럼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의 하나로 철저한 방공요새로 설계된 평양의 지하철 역사를 꼽는다. 한국보다 1년 앞선 1973년부터 개통된 평양 지하철은 3개 노선에 17개 역이 대동강 서쪽 시내를 연결하고 있다.(맨 왼쪽 사진) 모스크바를 본떠 높은 돔형 천장에 넓은 광장을 자랑하는 개별 역사는 평양 시민들 전부가 대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가장 관광객이 붐비는 영광역.(가운데 사진) 대부분 지하 100~150m 깊이에 자리한 지하철역은 45도 경사의 가파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맨 오른쪽 사진) 사진 통일부 제공
만약 행태주의적 사고방식을 불식시키지 못한 한-미 군사훈련 방식으로 북한과 전쟁을 수행한다면 전사자 수에서도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원자탄 폭격에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지하 방공호, 지하철 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양 지하철은 지하 평균 100m 깊이에서 운행된다. 대동강변 밑을 오가는 것이다. 내가 관찰하기로, 평양 시내에는 모두 17개의 지하철역이 2㎞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다. 그런데 각 지하철역은 운동장처럼 커다란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이곳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도 안성맞춤이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30~150m 깊이로 내려가는 동안 책을 보기도 좋다. 그런데 평양 인구는 200만명 정도 된다. 평양의 방공호, 지하철 등은 평양 인구를 모두 수용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에서도 이런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서울의 수많은 자동차에 장착된 연료통, 서울 전역에 거미줄처럼 연계된 도시가스 배관 등은 북한의 폭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지 않은가? ‘서울 불바다’ 발언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미국 해군 전투기 조종사를 지냈고 펜타곤(국방부)에서도 근무했던 군사전문가 팀퍼레이크 역시 “한국과 미국이 북한과 지상전을 벌인다면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할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미 해군 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펜타곤에서도 근무했던 군사전문가 팀퍼레이크. <한겨레> 자료사진
이제라도 우리는 무엇보다도 미국의 행태주의적 전쟁관이 남북한 군비경쟁을 교묘하게 조장함으로써 한반도 냉전을 끝없이 지속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한다. 미국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과 정치적 협상을 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CVID)라는 비현실적인 요구를 하면서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포기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런 반면 남한에 대해서는 미국의 핵우산을 이유로 핵무장을 막고 있다. 그러면 북의 핵이 두려운 남한은 미국의 군산복합체로부터 첨단 재래식 무기를 무한정 구입해야만 한다. 더욱이 미국은 한-미 군사훈련을 한국과 세계에 미국의 최첨단 신무기를 홍보하는 수단으로도 활용한다. 그런데도 한국은 미국의 행태주의적 사고방식에 세뇌되어 미국이 홍보하는 무기를 끝없이 사들여야만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한반도 군비경쟁이 끝없이 고조되는 바로 그 현장에서 말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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