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정의행동 대표 최근 핵발전소 폐쇄가 가장 많이 이뤄진 나라가 어디일까? 흔히 탈핵 정책을 말하면 독일을 많이 떠올린다. 2011년 핵발전소 17기를 운영 중이던 독일은 2022년까지 핵발전소를 모두 폐쇄할 예정이다. 하지만 폐쇄된 핵발전소는 독일보다 일본에 더 많다. 국내에는 일본이 핵발전소 재가동을 추진하는 대표적인 찬핵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일본 핵발전소 폐쇄가 이어진 데는 사연이 있다. 2011년 일본은 핵발전소 54기를 운영 중이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국민의 반대에도 일본 정부는 핵발전소 재가동 방침을 결정했다. 그리고 재가동을 위한 신규제기준을 마련했다. 과거 안전기준에 빠져 있던 격납용기, 원자로 노심 손상 방지 대책과 항공기 테러 방지 대책이 추가됐다. 일본 정부는 핵발전소 재가동을 위한 방안으로 신규제기준을 마련했지만, 최근 이 규제기준 때문에 폐쇄되는 핵발전소가 속출하고 있다. 천문학적인 안전 대책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2013년 9982억엔(약 11조6천억원)에 이르렀던 안전 대책 비용은 올해 7월, 5조744억엔(약 58조8천억원)으로 5배나 늘어났다. 그나마 아직 반영되지 않은 비용이 있어 앞으로 안전 대책 비용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사업자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효율이 떨어지는 노후 핵발전소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부을 이유가 없다. 이에 따라 핵발전소 폐쇄가 이뤄지고 있다. 지난달 31일,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2핵발전소 1~4호기를 모두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후쿠시마 제2핵발전소는 동일본 대지진 때 쓰나미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비상전원이 연결돼 폭발사고는 면했다. 하지만 도쿄전력은 지역주민과 지방자치단체의 끊임없는 폐쇄 요구에다, 건설된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핵발전소에 추가 비용을 투입해야 하느냐를 고민하다 결국 4기 모두 폐쇄하기로 했다. 이번 결정으로 후쿠시마현은 운영 중인 핵발전소가 없는 지역이 됐다. 이런 식으로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핵발전소 21기가 폐쇄됐다. 불과 8년 만에 우리나라 전체 핵발전소 수에 버금가는 핵발전소가 폐쇄된 것이다. 그렇다고 남은 33기가 모두 가동 중인 것도 아니다. 폐쇄되지 않고 남은 핵발전소 가운데 3분의 1 정도는 아직 재가동 신청도 하지 않았다. 이 중 일부는 사업자가 경제성 문제로 추가 투자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강 공사와 규제 심사가 다 끝났더라도 지자체 반대로 재가동하지 못하는 핵발전소도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핵발전소 재가동을 위해서는 중앙정부와 지자체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현재 가동 중인 핵발전소는 33기 가운데 9기뿐이다. 가동되는 핵발전소가 적으니 전체 전력생산에서 핵발전 비중도 낮다. 2010년 25.5%에 이르렀던 핵발전 비중은 2017년 3%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핵발전을 추월해 15.6%까지 늘었다. 아베 신조 정권은 2030년까지 핵발전 비중을 후쿠시마 사고 이전 수준인 20~22%까지 늘리겠다고 밝혔지만, 기존 핵발전소의 약 40%가 폐쇄된 상황에서 목표를 이루기는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다. 후쿠시마 사고 이전부터 짓던 핵발전소 2기를 건설 중이기는 하지만, 지역주민 반대로 더 이상 신규 핵발전소를 건설하기가 쉽지 않다. 또 노후 핵발전소의 추가 폐쇄가 이뤄질 가능성도 높다. 탈핵을 핵발전소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본다면, 일본은 명시적으로 탈핵 정책을 부정하고 있지만 여러 이유로 과거보다 핵발전소에서 많이 벗어났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그동안 핵산업계가 자랑하던 안전성과 경제성 문제가 오히려 족쇄가 되어 과거의 영광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탈핵의 길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다양하다. 독일처럼 사회적 합의와 법제도를 통해 단계적으로 탈핵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지만, 일본처럼 현실적인 이유로 핵발전소가 줄어드는 나라도 있다. 미국 역시 수십년 만에 신규 핵발전소 건설이 재개됐지만, 운영 중인 핵발전소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국가 에너지 정책을 분석할 때 장밋빛 전망으로 가득 찬 핵산업계 보고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은 결코 산업계 희망대로만 이뤄지지는 않는다.
칼럼 |
[우리가 잘 몰랐던 에너지 이야기] 탈핵 아닌 듯 탈핵 중인 일본 / 이헌석 |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최근 핵발전소 폐쇄가 가장 많이 이뤄진 나라가 어디일까? 흔히 탈핵 정책을 말하면 독일을 많이 떠올린다. 2011년 핵발전소 17기를 운영 중이던 독일은 2022년까지 핵발전소를 모두 폐쇄할 예정이다. 하지만 폐쇄된 핵발전소는 독일보다 일본에 더 많다. 국내에는 일본이 핵발전소 재가동을 추진하는 대표적인 찬핵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일본 핵발전소 폐쇄가 이어진 데는 사연이 있다. 2011년 일본은 핵발전소 54기를 운영 중이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국민의 반대에도 일본 정부는 핵발전소 재가동 방침을 결정했다. 그리고 재가동을 위한 신규제기준을 마련했다. 과거 안전기준에 빠져 있던 격납용기, 원자로 노심 손상 방지 대책과 항공기 테러 방지 대책이 추가됐다. 일본 정부는 핵발전소 재가동을 위한 방안으로 신규제기준을 마련했지만, 최근 이 규제기준 때문에 폐쇄되는 핵발전소가 속출하고 있다. 천문학적인 안전 대책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2013년 9982억엔(약 11조6천억원)에 이르렀던 안전 대책 비용은 올해 7월, 5조744억엔(약 58조8천억원)으로 5배나 늘어났다. 그나마 아직 반영되지 않은 비용이 있어 앞으로 안전 대책 비용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사업자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효율이 떨어지는 노후 핵발전소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부을 이유가 없다. 이에 따라 핵발전소 폐쇄가 이뤄지고 있다. 지난달 31일,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2핵발전소 1~4호기를 모두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후쿠시마 제2핵발전소는 동일본 대지진 때 쓰나미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비상전원이 연결돼 폭발사고는 면했다. 하지만 도쿄전력은 지역주민과 지방자치단체의 끊임없는 폐쇄 요구에다, 건설된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핵발전소에 추가 비용을 투입해야 하느냐를 고민하다 결국 4기 모두 폐쇄하기로 했다. 이번 결정으로 후쿠시마현은 운영 중인 핵발전소가 없는 지역이 됐다. 이런 식으로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핵발전소 21기가 폐쇄됐다. 불과 8년 만에 우리나라 전체 핵발전소 수에 버금가는 핵발전소가 폐쇄된 것이다. 그렇다고 남은 33기가 모두 가동 중인 것도 아니다. 폐쇄되지 않고 남은 핵발전소 가운데 3분의 1 정도는 아직 재가동 신청도 하지 않았다. 이 중 일부는 사업자가 경제성 문제로 추가 투자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강 공사와 규제 심사가 다 끝났더라도 지자체 반대로 재가동하지 못하는 핵발전소도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핵발전소 재가동을 위해서는 중앙정부와 지자체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현재 가동 중인 핵발전소는 33기 가운데 9기뿐이다. 가동되는 핵발전소가 적으니 전체 전력생산에서 핵발전 비중도 낮다. 2010년 25.5%에 이르렀던 핵발전 비중은 2017년 3%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핵발전을 추월해 15.6%까지 늘었다. 아베 신조 정권은 2030년까지 핵발전 비중을 후쿠시마 사고 이전 수준인 20~22%까지 늘리겠다고 밝혔지만, 기존 핵발전소의 약 40%가 폐쇄된 상황에서 목표를 이루기는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다. 후쿠시마 사고 이전부터 짓던 핵발전소 2기를 건설 중이기는 하지만, 지역주민 반대로 더 이상 신규 핵발전소를 건설하기가 쉽지 않다. 또 노후 핵발전소의 추가 폐쇄가 이뤄질 가능성도 높다. 탈핵을 핵발전소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본다면, 일본은 명시적으로 탈핵 정책을 부정하고 있지만 여러 이유로 과거보다 핵발전소에서 많이 벗어났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그동안 핵산업계가 자랑하던 안전성과 경제성 문제가 오히려 족쇄가 되어 과거의 영광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탈핵의 길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다양하다. 독일처럼 사회적 합의와 법제도를 통해 단계적으로 탈핵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지만, 일본처럼 현실적인 이유로 핵발전소가 줄어드는 나라도 있다. 미국 역시 수십년 만에 신규 핵발전소 건설이 재개됐지만, 운영 중인 핵발전소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국가 에너지 정책을 분석할 때 장밋빛 전망으로 가득 찬 핵산업계 보고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은 결코 산업계 희망대로만 이뤄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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