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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22 05:59 수정 : 2019.11.22 20:15

[책&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김호연재(1681~1722)는 한시와 한글시를 합쳐 240여 수라는 비교적 많은 양의 시를 남긴 조선후기의 시인이다. 작품의 대부분은 혼인 이후 20년 동안 쓴 것인데, 주부 생활을 하면서 이만한 양을 쏟아냈다는 것은 필시 사연이 있을 법하다. 게다가 시재(詩材)가 그리움이나 외로움, 마음의 상처 등 복잡한 내면의 풍경이라 도대체 이 ‘명문가’의 여인에게 무슨 일인가 싶다.

남자든 여자든 조선시대에도 사람에 접근하는 일정한 코드가 있는데, 몇 대조가 누구라든가 누구의 몇 대손이라든가 하는 것이다. 소속 가문을 밝히는 것은 오늘날 생년이나 학력, 직업 등과 같은 인물의 기본 정보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김호연재의 기본 정보는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시다. 아버지 김성달은 선원 김상용의 증손이고, 어머니는 월사 이정귀의 후손에 월당 강석기의 외손이다. 남편 송요화는 송준길의 증손이다. 김·송의 혼인은 대표적인 두 세도가 장동 김씨와 은진 송씨의 결합이면서 종횡으로 연결된 노론 세가의 확장과 결속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신의 현재를 가능케 한 그 선조가 과연 명성과 지위에 걸맞은 역사적 진실을 담보하고 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조상이란 이미 구체적 개인을 넘어 문중을 결속시키는 상징 기호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명문 세도가에서 차출된 남녀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부부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행복의 정의가 간단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같은 공간에 ‘함께 사는’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 호연재 부부는 아예 등을 지고 살았다. 남편 송요화가 늘 밖으로만 돌며 ‘규모 없이 방탕하게’ 구는 동안 호연재는 홀로 남은 방에서 시를 썼다. 주로 시골의 풍경을 노래하거나 친정 형제자매들과 소통하는 형식의 시들이다. 그 많은 글 중에 남편과 나누는 시는 단 한 편도 없다. ‘자경’(自警)의 형식을 빌린 고백의 글에서는 시집 생활이 엉망이었음을 실토한다. 시부모와 남편 그리고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모든 것이 어설퍼 오롯이 그 원망을 받아야 했다. 평생토록 시속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지체 높은 시집 사람들과도 껄끄러운 것이 너무 많았다. 눈썹을 내리고 조심하며 사는 동안 연기와 불꽃이 창자 속에서 치솟았다. 그는 “화복은 본디 정해져 있는 운명일 뿐 인력이 아니로다”라고 하는데, 혼자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자신을 ‘규중의 물건’에 비유하며 고통스러워하던 호연재가 자기 치유의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얼마나 아까운가, 이 호탕한 군자의 마음 내 마음! 자신을 군자에 비유한 호연재는 불화만 계속되는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다. 그에 의하면 시집 식구는 명목상 친(親)이지만 정은 소원하고, 은혜는 박하지만 의리는 무거운 존재들이다. 좋으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끊어버릴 수 없는 관계다. 개선을 위해 노력은 하되 “속마음을 드러내지 말 것”을 주문한다. 유사한 처지의 여자들을 향한 이러한 글쓰기가 호연재에게는 상처를 치유하며 자기 존엄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었다. 시와 함께 술과 담배 또한 그의 ‘걱정스런 창자’를 품어주었다. 자신을 “즐거움도 슬픔도 없는 술 취한 한 미치광이”(無樂無悲一醉狂)로 표현하고, “너를 필 때면 그 신기한 맛이 일천 염려를 사라지게 한다”며 담배 예찬론을 펼친다.

불행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불행을 벗어나는 방법을 얻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김호연재는 문학적 성취뿐 아니라 조선시대 가족문화에서 여성이 처한 고통의 보편성을 언어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아들에게 남긴 편지에 “이 어미는 귀신의 희롱을 받아 반평생 일신에 차질이 많았다”는 호연재. 미움도 원망도 넘어선 그녀에게서 호연(浩然)의 기상이 느껴진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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