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6.28 06:01
수정 : 2019.06.28 20:17
[책과 생각] 이민경의 유연하고 단단하게
최근 피해자에게 술을 먹이고 성폭행한 남성이 8년에서 3년으로 감형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이때 피해자의 연령이 만 8살이라는 점은 고려되지 않았다. 2014년 지적장애가 있는 13살 여아가 성폭력 가해 남성 여럿에게 떡볶이를 얻어먹은 사실이 화대로 인정되어 도리어 성매매 여성으로 취급되었던 사건과 유사하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폭력으로부터 합의된 성관계의 기색을 찾아내고자 할 때에만 인정된다. 어른 남성이 술을 먹였다 해도 아이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성관계를 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성관계를 하지 않을 권리가 부정되었다는 진술은 존중되지 않는다. 아동이 자기결정으로 성관계를 했다는 가정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지만 가정이 틀렸다는 진술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완벽한 신빙성이 요구된다. 아이는 성폭력을 의심받을 때에만 온전한 인간과 동등하게 대우될 뿐 허점 있는 진술을 할 수도 있는 아동기를 지난다는 사실은 참작되지 않는다.
여아가 일찍이 ‘다 큰 존재’로 여겨지면서 아동기를 박탈당하는 문제는 비단 성폭력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두드러지는 문제란 여아의 꾸밈이다. 아이라도 좋아하는 것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과 여아가 원해서 하는 화장을 막을 수 없다는 논리는 강력하게 결합되어 양육자들 사이에서 유통된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추구할 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미명은 여아가 꾸밈에 대해 보이는 욕망을 본질화한다. 학부모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막을 수 없다면 제대로’라는 말은, 여아의 욕망을 무작정 가로막는 대신 성분 좋은 화장품을 사 주는 일련의 경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법정에서 여아가 스스로의 욕구에 따라 성관계 여부를 결정할 수 있고 폭력에 대해 저항할 여지도 있는 오롯한 인간으로 전제되는 데에 남성중심적인 의도가 깃든 것처럼, 꾸밈에 대해 여아가 이미 완성된 욕망을 가진 존재로 상정되는 배경에도 뷰티 산업의 공세가 숨어 있다. 2017년 어린이 화장품 시장 규모는 2000억원 규모였고 립스틱 판매량은 전해 대비 549% 증가했다. 온라인 오픈마켓 11번가의 집계에 따르면 2018년 기준 1월에서 11월까지 어린이 화장품 매출이 2017년 대비 360% 상승했다. 가장 유명한 키즈 뷰티 유튜버의 구독자 수는 182만명에 달하고 인스타그램에 ‘#어린이화장품’이 태그된 게시물은 2019년 6월 기준 17만9천개다. 학부모들 사이에서 나온 듯했던 ‘막을 수 없다면 제대로’는 어린이 화장품 기업의 자사 소개 웹페이지에 ‘가파르게 성장중인 블루오션’이라는 문구 곁에 나란히 쓰여 있다. 성인 남성이 여아에게 행사한 위력이 지워지고 일어난 일만 남듯이, 여아의 욕망을 새로 개척할 시장으로 바라보는 산업의 위세는 지워지고 여아가 내리는 선택만 남는다.
여성에게는 본래 실수할 기회가 허락되지 않는다. 증명에 대한 강박과 낙오에 대한 불안은 여성 개인을 소진시키고 구조적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는 실패조차 모조리 여성 자신의 책임으로 떠안게 만들었다. 이 문제는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지는 대신 돌봄 받는 대상이 되고 실수를 하더라도 책임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는 아동기를 지나는 여아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여아에게 허용되어야 할 것은 스스로를 온전히 책임질 기회가 아니라 책임을 내려놓을 기회다. <끝>
작가,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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