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24 17:00
수정 : 2019.10.25 14:18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누군가 죽어야 세상이 달라지려나’ 하고 자조적으로 말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말도 틀렸다. 지금도 노동자들은 죽는다. 사고와 직업병으로 하루 5명 이상이 죽는다. 그렇게 죽는 이들 대부분은 비정규직이다. 건설 현장에서 사망하는 노동자의 95%가 비정규직이고, 30대 기업 산재사망자도 95%가 하청노동자다. 그런데 이 죽음의 극히 일부만 단신으로 세상에 알려질 뿐 대부분의 죽음은 흔적조차 없다. 누군가 계속 죽고 있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그 죽음의 대다수에는 ‘작업자 과실’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2011년 인천공항철도에서 선로 유지·보수를 하던 하청노동자 5명이 열차에 치여 사망했을 때, 철도공사는 하청노동자들의 ‘무단침입’이 사망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2016년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김군의 유가족은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아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김용균씨의 유가족도 ‘가지 말라는 곳에 가서 하지 말라는 일을 했다’는 회사 쪽의 설명을 들었다. 싸우지 않으면 회사가 규정하는 대로 죽음이 기록된다.
2014년 4월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가 에어호스에 목이 감긴 채 사망했다. 경찰은 이 죽음을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쇳가루가 날려 한치 앞도 보기 힘든 곳이었고, 에어호스에 결함이 있었는데도 경찰은 산재사망의 가능성을 배제했다. 2019년 8월, 법원의 판결로 이 죽음은 산재로 인정되었다. 5년4개월 동안 유가족과 동료들이 싸우지 않았다면 이 노동자의 죽음은 아직도 자살로 기록돼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의 죽음은 때로는 무례하게 다뤄진다. 발전사는 산재사망사고 발생 부서의 책임을 묻는 평가지표에, 사망자가 정규직이면 12점을 감점하고 하청노동자는 4점만 감점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목숨에도 등급을 매긴 것이다. 2017년 7월 충북도청 소속 도로보수원이 폭우에 침수된 도로를 복구하려고 점심도 거른 채 16시간을 일하고 쉬던 중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이 노동자가 공무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순직 인정을 거부했다. 유가족과 노동조합이 나서서 싸우고 나서야 순직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더 많이 말해야 한다. 억울함에 피멍 드는 유가족들이 없도록 하려면 왜 죽어야 했는지 자꾸 물어야 한다. 책임이 있는 자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더 많은 피해자와 유가족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런데 유가족은 정보를 받을 수 없고 현장에는 접근조차 못한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도 알기 어렵다. 극히 일부만이 여론의 지지와 시민사회단체 혹은 노동조합에 힘입어 죽음의 원인을 밝히게 된다. 노동자의 죽음을 기업 경영의 리스크 정도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죽음의 원인을 밝히고 재발방지 대책을 세우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는 아들의 누명을 벗겨주려고 싸웠다고 말했다.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가 “김용균씨는 작업지시를 충실히 지켜서 죽었다”고 결과를 발표했을 때, 이제야 아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 곁에서 함께 외치고, 일터를 안전하게 만드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단법인 김용균재단’을 만들었다.
김용균재단은 10월26일에 출범총회를 한다. 알려지지 않는 죽음, ‘작업자 과실’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죽음들을 만나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자 한다. 고통 속에 있는 유가족을 만나,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원인을 밝히고 재발방지 대책을 세우자고 말하려고 한다. 산재사망자 유가족이 정보가 없고 도움을 받을 곳도 없어 낙담할 때, 당신 곁에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주려고 한다. 아니, 애초에 이런 죽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를 바꾸고 일터의 안전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려고 한다. 노동자의 죽음을 하찮게 여기는 세상을 바꾸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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