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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31 07:02 수정 : 2019.10.10 10:10

우연히 만난 지산(전무송)과 법운(안성기)은 함께 길을 떠나며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39)만다라
감독 임권택(1981년)

우연히 만난 지산(전무송)과 법운(안성기)은 함께 길을 떠나며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멀리 길이 보인다. 그것 말고는 달리 아무것도 없는 길. 거기 버스 한대가 지나간다. 이 버스를 군인들이 멈춰 세운다. 그 버스를 탄 두 승려는 그렇게 처음 만난다. 나이가 많은 지산(전무송) 스님은 이 절 저 절 돌아다니면서 그저 술에 취해 나날을 보내고, 젊은 법운(안성기) 스님은 화두를 안고 수행 정진을 멈추지 않는다. 그 둘은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임권택의 <만다라>는 두 승려의 만행길이 이야기의 전부다. 봄날의 화창한 시골길로 시작해서 한겨울의 눈 쌓인 산사로 이어지고, 텅 빈 바닷가 모래 해변에서 서울역 앞 사창가 유곽으로 다시 이어지고, 길에서 길로 이어진다. 병 속의 새를 어떻게 꺼내 들 수 있을까. 아니, 거기 새가 정말 있기는 한 것일까.

<만다라>는 대답이 아니라 질문에 관한 영화이며, 선적(禪的)인 깨달음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번뇌에 관한 영화이다. 처음에 법운은 지산을 경멸하지만, 그들이 함께 만행길에 오르면서 그것은 염려와 연민으로 바뀌며, 지산이 자신과 또 다른 방법으로 돈오(頓悟)를 향해 나아가는 용맹정진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 마음은 존경심이 된다. 하지만 법운은 지산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수행을 그저 계속할 따름이다.

엄격한 수행에 매달리는 법운(안성기)과 달리 지산(전무송)은 속세의 잡인처럼 술에 취해 살아간다.
두개의 길.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법운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어떻게 해탈을 이룰 것인가. 지산은 법운에게 물어보고 또 물어본다. 보살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무시무시한 대화. 임권택은 경청(傾聽)의 미장센이라고 할 만한 연출로 그들을 뒤따르고 그때 한걸음 한걸음은 정신적인 동선이 된다. 그리고 그 순간들을 촬영한 정일성은 아름답지 않게 찍기 위하여 거의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구태여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진흙탕 길이 되는 순간의 이미지들. 연꽃은 어디서 피어나 어떻게 아름다운가. 그때 풍경은 실존의 조건이 되었고, 세계는 질문 앞의 사태가 되었으며, 영화는 정신적인 하나의 상태가 되었다. <만다라>는 본다기보다 경험하는 영화이다. 무엇을? 나는 걸어간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어떻게? 그 정신의 정화작용. 단 한마디로 배움의 영화.

정성일/영화평론가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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