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28 08:25
수정 : 2019.10.28 09:26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80)접속
감독 장윤현(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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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접속>은 구태의연하게 흐를 수 있었던 두 남녀의 만남을 피시 통신이라는, 당시만 해도 신선한 공간에 접속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감수성의 러브스토리’를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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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드라마는 친근한 관계를 통해 억압과 금기를 재현하며 이때 과잉된 에너지가 동원되기 마련이다. 한국영화의 멜로드라마에서 그러한 친근한 관계는 주로 가부장제 안에 있었고 그들이 동원한 과잉은 대부분 눈물이었다. 그래서 한국 멜로의 주인공들은 90년대 중후반까지도 ‘가족’과 ‘눈물’의 굴레를 벗어나기가 어려워 보였다. 이들이 사회적 위계질서에 희생당하거나 자신의 욕망으로 자멸과 파멸을 오가는 눅눅한 장르적 관습에 갇힌 채 점차 관객들에게도 외면당할 때쯤 등장한 <접속>.
감정의 무덤 속에 갇힌 남자 동현(한석규)과 감정을 숨기고 살아가는 여자 수현(전도연)은 각자의 사연으로 가슴앓이하며 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유니텔로 서로를 알게 된 뒤 채팅을 하며 익명의 친분을 쌓아가던 어느 날, 수현은 용기를 내어 동현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그런 수현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동현은 마침내 좀 더 다가가기로 결심한다.
자칫 구태의연하게 흐를 수 있었던 두 남녀의 만남은 피시 통신이라는 (당시만 해도) 신선한 공간에 접속하여 ‘가족’이라는 관습적 틀을 자연스럽게 극복하고 이른바 ‘새로운 감수성의 러브스토리’를 구현했다. 이렇게 장르적 강박에서 벗어나 철저히 개인화된 인물들은 모두 감정 순환의 문제를 겪고 있고, 그것은 바쁜 일상 가운데 황량해져가는 도시인의 모습을 환유하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도심의 가로등과 네온사인의 불빛을 무심히 늘여놓는 몽타주들은 오색영롱한 듯 권태롭고 절제된 두 인물의 내면과 조화를 이뤘다.
<접속>에서 동현과 수현의 감정 변화는 장윤현 감독의 전작 <파업전야>에서 회의와 투지를 오가던 노동자들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아마도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접속>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만나고자 하는 그 ‘의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의지’로 감독은 이 영화에서 한국 멜로의 습한 기운을 말끔히 닦아낸 뒤 그 빈자리를 산뜻한 기운으로 채우는 데 성공하였고, 그 결과 <접속>은 장르적 클리셰를 넘어 새로운 관습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윤필립/영화평론가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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