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뉴스팀장 독일과 일본은 꼼짝없는 비교 세트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1970년 비 오는 겨울날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유대인 집단 거주지) 기념비에 무릎을 꿇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3년 A급 전범들까지 받드는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했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반발은 이런 대비를 굳힌다. 12일에는 홍콩인 2명이 야스쿠니 앞에서 “난징대학살을 잊지 말라”는 펼침막을 들고 전범 도조 히데키의 이름을 쓴 종이를 태우다 체포됐다. 일본군의 난징 점령 81돌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반성 요구자들과 거부자들의 싸움은 질기다. 거친 질문을 던져본다. 지난날 독일인들은 지금 독일인들과 다른가? 현재의 일본인들은 그때 일본인들과 또 얼마나 같은가? ‘원래 그렇다’는 결정론에 빠지면 인과관계와 합리적 설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른 많은 잘못된 것들처럼 첫 단추를 끼운 구멍이 달랐다는 점에서 하나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걸 이해해야 오늘날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의 태도가 더 분명히 보인다. 독일은 두번 대전을 일으켰으니 재범이었다. 나라는 원래 4개로 찢어졌다. 동독을 차지한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점령지까지 합치면서 동·서독 체제가 됐다. 동독에는 200만 소련군이 있었다. 서독은 주변국들 마음을 얻지 않고서는 회생할 방도가 묘연했다. 일본은 미국이 혼자 점령했다. 일본한테는 별로 당한 게 없는 소련은 전리품으로 쿠릴열도 섬 4개와 공장 기계를 뜯어 갔을 뿐이다. 중국은 내전에 빠져 밖은 신경 쓸 수 없었다. 히틀러와 히로히토의 엇갈린 운명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스스로를 처단한 히틀러에게 책임의 많은 부분을 넘기고 심지어 나치 피해자 행세까지 하는 게 가능했다. 반성도 홀가분한 상태에서 할 수 있었다. 반면 히로히토는 항복 선언 및 ‘인간 선언’을 자리 보전과 맞바꿨다. 얼핏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2차대전이 끝나자 전쟁범죄 책임이 있거나, 편을 잘못 골랐거나, 무능했던 왕조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이탈리아 군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도 히로히토와 비교할 만하다. 사세가 불리해지자 무솔리니를 체포하고 연합국 편에 선 사람이다. 그런데도 패전의 굴레를 벗지 못해 양위한 데 이어 그 아들은 34일 만에 국민투표로 쫓겨났다. ‘히로히토도 멀쩡한데 내가 왜…’라는 생각에 억울했을 법하다. 히로히토가 받은 면죄부의 값에는 신성한 군주만은 내줄 수 없다는 일본인들의 결사적 의지도 들어 있다. 그런데 왕에게 제대로 죄를 묻지 못하는데 신민들한테 깊은 책임 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이렇게 일본에서는 패전에 대한 애석과 통탄이 수치와 반성을 앞서게 됐다. 1972년 방중한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는 “전쟁 중 중국 인민에게 폐를 끼쳤다”는 알량한 말로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를 경악시키기도 했다. 제국주의와 전쟁 책임에 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시민 일반의 책임 의식은 더 희박할 수밖에 없다. 피해 민족으로서는 진지한 반성을 요구해야 하지만,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여기서 이해란 그 입장이 당연하다고 인정하려는 게 아니라 사정과 맥락을 앎으로써 더 적절히 대응하기 위한 수단이다. 작을지라도 긍정적인 움직임은 평가해줘야 한다. 한국 판결을 따르라고 외치는 일본 시민들도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2015년 옛 서대문형무소에서 무릎 꿇고 사죄했다. 현직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런 수준 높은 양심에 더 큰 박수를 쳐주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ebon@hani.co.kr
칼럼 |
[코즈모폴리턴] 양심 불량 일본 이해하기 / 이본영 |
국제뉴스팀장 독일과 일본은 꼼짝없는 비교 세트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1970년 비 오는 겨울날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유대인 집단 거주지) 기념비에 무릎을 꿇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3년 A급 전범들까지 받드는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했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반발은 이런 대비를 굳힌다. 12일에는 홍콩인 2명이 야스쿠니 앞에서 “난징대학살을 잊지 말라”는 펼침막을 들고 전범 도조 히데키의 이름을 쓴 종이를 태우다 체포됐다. 일본군의 난징 점령 81돌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반성 요구자들과 거부자들의 싸움은 질기다. 거친 질문을 던져본다. 지난날 독일인들은 지금 독일인들과 다른가? 현재의 일본인들은 그때 일본인들과 또 얼마나 같은가? ‘원래 그렇다’는 결정론에 빠지면 인과관계와 합리적 설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른 많은 잘못된 것들처럼 첫 단추를 끼운 구멍이 달랐다는 점에서 하나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걸 이해해야 오늘날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의 태도가 더 분명히 보인다. 독일은 두번 대전을 일으켰으니 재범이었다. 나라는 원래 4개로 찢어졌다. 동독을 차지한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점령지까지 합치면서 동·서독 체제가 됐다. 동독에는 200만 소련군이 있었다. 서독은 주변국들 마음을 얻지 않고서는 회생할 방도가 묘연했다. 일본은 미국이 혼자 점령했다. 일본한테는 별로 당한 게 없는 소련은 전리품으로 쿠릴열도 섬 4개와 공장 기계를 뜯어 갔을 뿐이다. 중국은 내전에 빠져 밖은 신경 쓸 수 없었다. 히틀러와 히로히토의 엇갈린 운명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스스로를 처단한 히틀러에게 책임의 많은 부분을 넘기고 심지어 나치 피해자 행세까지 하는 게 가능했다. 반성도 홀가분한 상태에서 할 수 있었다. 반면 히로히토는 항복 선언 및 ‘인간 선언’을 자리 보전과 맞바꿨다. 얼핏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2차대전이 끝나자 전쟁범죄 책임이 있거나, 편을 잘못 골랐거나, 무능했던 왕조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이탈리아 군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도 히로히토와 비교할 만하다. 사세가 불리해지자 무솔리니를 체포하고 연합국 편에 선 사람이다. 그런데도 패전의 굴레를 벗지 못해 양위한 데 이어 그 아들은 34일 만에 국민투표로 쫓겨났다. ‘히로히토도 멀쩡한데 내가 왜…’라는 생각에 억울했을 법하다. 히로히토가 받은 면죄부의 값에는 신성한 군주만은 내줄 수 없다는 일본인들의 결사적 의지도 들어 있다. 그런데 왕에게 제대로 죄를 묻지 못하는데 신민들한테 깊은 책임 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이렇게 일본에서는 패전에 대한 애석과 통탄이 수치와 반성을 앞서게 됐다. 1972년 방중한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는 “전쟁 중 중국 인민에게 폐를 끼쳤다”는 알량한 말로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를 경악시키기도 했다. 제국주의와 전쟁 책임에 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시민 일반의 책임 의식은 더 희박할 수밖에 없다. 피해 민족으로서는 진지한 반성을 요구해야 하지만,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여기서 이해란 그 입장이 당연하다고 인정하려는 게 아니라 사정과 맥락을 앎으로써 더 적절히 대응하기 위한 수단이다. 작을지라도 긍정적인 움직임은 평가해줘야 한다. 한국 판결을 따르라고 외치는 일본 시민들도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2015년 옛 서대문형무소에서 무릎 꿇고 사죄했다. 현직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런 수준 높은 양심에 더 큰 박수를 쳐주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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