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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2.07 18:47 수정 : 2019.06.11 09:45

이본영
국제뉴스팀장

비밀은 달콤하다. 상대가 알면 경탄할 소식일수록 더 짜릿하다. 비밀은 치명적일 수도 있다. 무한정 지켜야 할 것이라면 근심의 원천이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구기 13일 전인 1945년 7월24일 포츠담에서 소련의 스탈린을 만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그렇게 복잡미묘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국이 “비상한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를 개발했다고 자랑했다. 트루먼은 스탈린이 그게 뭐냐고는 묻지 않고 “반가운 소식인데, 일본에다 쓰면 유용하겠다”며 시큰둥하게 반응했다고 기록했다. 스탈린의 전기에는 사실은 그도 미국의 원폭 실험을 첩보로 이미 알고 있었다고 나온다. 미국으로서는 제조법이 쭉 비밀로 남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패권 다툼의 역사는 게임 체인저급 무기 경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비밀을 지키려는 자와 빼내려는 자의 다툼도 치열하다. 동로마제국은 적 함대를 공포에 떨게 한 ‘그리스의 불’로 상당 기간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동로마는 천사가 준 무기라며 제조법을 꽁꽁 숨겼다. 적국은 동로마의 화공선을 나포하고도 석유에 무엇인가 섞었다는 그 무기를 복제하지 못했다. 고려의 최무선이 알아낸 중국의 화약 제조술도 일급비밀이었다.

인류 문명의 존폐마저 위협하는 핵무기는 제조법이 대단한 비밀은 아니라는 점이 더구나 끔찍하다. 그냥 놔두면 수십개국이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이 난국을 어쩌나. 미국과 소련 주도로 1969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이 만들어졌다. 실패 사례(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도 있지만 많은 국가가 참여한 성공한 군축 조약이다. 조약 가입과 탈퇴를 반복하다 결국 핵무기를 만든 북한을 압박하는 ‘국제사회’의 정당성의 배경에는 비확산에 대한 공감대가 있다. 5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대북 압박만큼은 일치단결한 것은 보기 드문 사례다.

그런데 북핵이라는 터널의 끝이 보일 듯 말 듯 한 시기에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가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6개월의 통고 기간을 거쳐 파기하겠다고 선언했다. 핵탄두 운반체인 지상 발사 미사일(사거리 500~5500㎞)을 제한하는 이 조약은 핵군축의 상징이다. 실전 배치 핵탄두 감축 약속으로 2021년 만료 예정인 미-러의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도 연장 가능성이 불투명해졌다. 이런 움직임은 핵확산금지조약 위반이라 해도 무방하다. 조약은 비보유국의 핵무기 보유 금지뿐 아니라 보유국의 핵군축 노력도 명시하기 때문이다. 이 조약을 만들 때 ‘당신들한테는 천부인권 말고 천부 핵보유권도 있느냐’라는 취지의 시비가 있었지만 강대국들은 자기들도 핵군축에 나서겠다는 논리로 무마했다. 이후로도 핵군축을 하기는 한다는 주장으로 버텼다. 지금 그마저 무너지는 것이다.

국제정치란 강자의 질서라지만 이건 너무하다. 강대국들의 핵무기 과점욕이라는 비밀 아닌 비밀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핵보유국의 적대국은 계속 두려움에 떨어야 하고, 핵보유국의 친구들은 핵우산 제공이라는 자비에 매달려야 한다. 역시 중요한 대량살상무기 금지 조약인 화학무기금지협약과 비교하면 핵확산금지조약의 불평등성이 더 두드러진다. 화학무기금지협약은 보유국과 비보유국 구분 없이 누구나 화학무기를 완전히 없애도록 규정했다. 두 조약을 종합하면, 핵보유국들이 비보유국들에 ‘모두 단도(화학무기)는 버리자. 단, 우리는 도끼(핵무기)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셈이다. 이제 도끼 수도 늘리고 날도 벼리겠단다.

2만기 넘는 핵탄두 보유국들한테 너희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이라고 다시 요구할 때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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