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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09 16:50 수정 : 2019.06.11 09:44

이본영
국제뉴스팀장

우리 시대에 간단한 사상 표현 하나로 극찬과 함께 맹렬한 비판을 받은 이를 꼽으라면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첫째다. 30년 전인 1989년 여름 <내셔널 인터레스트>라는 유명하지 않은 외교정책 전문지에 ‘역사의 종언?’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실어 주목받기 시작한 사람이다. 이후 물음표만 뗀 같은 이름의 책으로 역사의 변화를 명쾌하게 짚어낸 학자로 우뚝 섰다. ‘역사의 종언’ 한마디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만큼이나 간명하고 매력적이었다.

논란이 컸다는 얘기는 그만큼 지지도 강력했다는 뜻이다. 자유민주주의가 파시즘을 꺾은 데 이어 공산주의의 무릎도 꿇렸다는, 그래서 인류 진보와 역사 발전은 자유민주주의로 완성된다는 게 ‘역사의 종언’이 말하는 바다. 역시 ‘역사의 종언’이라는 헤겔의 개념을 수용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역사 진보의 끝이 아니라고 했다. 후쿠야마는 마르크스가 먼저 쓴 개념으로 마르크스에게 한 방 먹인 것이다. 글을 발표하고 몇달 안 돼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나중에 소련도 해체되니까 그의 주장은 더 설득력 있고 날카로워 보였다. 한편에서는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근거가 박약하다, 너무 서구 중심적이다, 자본주의의 승리를 자축하는 팡파르일 뿐이다라는 식이었다. 이후로도 미국과 러시아의 신냉전 조짐, ‘자유’와 ‘민주’가 빠진 중국 자본주의의 대약진, 2008년 금융위기 등이 그의 신뢰도를 깎아먹었다.

이제 후쿠야마는 한 세대 동안 이어진 논란에서 또 실점 위기를 만났다. 이번에는 그가 최후의 승자로 선언한 셈인 미국에서 도전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돌출한 사회주의 담론이 그것이다.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등 일부 민주당 쪽 대선 주자들은 미국 자본주의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 언론은 사회주의 담론의 진군에 자본가들이 밤잠을 설친다며 호들갑까지 떤다. 후퇴를 모르는 불평등 확대가 민주주의마저 갉아먹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요즘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는 매카시즘의 시대도 아닌데 증인들에게 가끔 “당신은 사회주의자요?”라는 질문이 던져진다. 미국에서 사회주의라는 표현은 혁명적 맥락 없이 쓰는 경우가 많지만, 자본주의가 그만큼 긴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후쿠야마는 승자는 방종하기 쉽다는 점을 놓쳤다. 경쟁자가 사라지면 나태해지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다. 영국 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후쿠야마가 역사의 완성을 선언한 이듬해인 1990년 “자본주의와 부자는 당분간 겁먹을 일이 없다”고 썼다. 세계적으로 더욱 가차없는 초과이윤 추구의 시대가 열렸다는 취지다. 자본주의의 최대 적은 사회주의였지만,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전에 본의 아니게 공헌한 것도 사회주의다. 소련과 사회주의라는 강적이 있었기에 서구는 계급 갈등에 주의를 기울이고 복지에 신경을 썼다. 안 그러면 서유럽에까지 붉은 깃발이 걸릴 수도 있었으니까. 경쟁 상대가 사라진 지 30년이 된 상황에서 세계화, 정보기술 발달, 노동자 단결력 약화 등이 최악의 불평등 상태로 인류를 더 깊숙이 끌고들어가고 있다.

사회주의 담론만이 위협은 아니다. 체제 내의 불평등 구조에 집중하는 사회주의와는 달리 증오를 외부로 돌리는 것을 선호하는 극우 포퓰리즘의 행각은 갈수록 노골적이다. 극우 포퓰리즘을 파시즘의 태아라고 한다면, 자유민주주의는 후쿠야마가 게임 종료를 선언한 과거의 거대한 두 적수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된 셈이다. 지금의 토대 위에서 후쿠야마가 체면을 얼마나 더 깎일지 말지는 자본주의 스스로에 달렸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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