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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1 18:09 수정 : 2019.08.01 19:15

조계완
국제뉴스팀 기자

“일본인은 미국이 지금까지 전력을 기울여 싸운 적 가운데 가장 낯선 적이었다.”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1946년에 펴낸 <국화와 칼>의 첫 문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 군인을 포함해 일본 사람의 특이한 행동과 습성을 파악해 달라고 미국 국무부가 작성을 의뢰한 연구서다. 책이 나오기 전에 전쟁은 끝났지만, 베네딕트는 “전쟁에서 이처럼 이질적인 행동·사유 습관을 고려해야 할 필요에 직면한 상대는 일찍이 없었다”며 “여러 태평양 섬에서 일련의 상륙작전이나 병참술에 관한 극히 어려운 문제들보다도 그 이상의 것, 즉 적의 성질을 알아내야 했다”고 당혹스러운 심정을 적었다. 또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인에 대해 쓰인 저작들에는 세계 어느 국민에게도 관찰되지 않은, ‘그러나 또한’(but also)이라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 연발되고 있다고 묘사했다. 일본에 단 한번도 가본 적 없지만 관련 자료들만으로 주의 깊고 흥미롭게 일본(인)을 들여다본 그는 “일본인은 아주 독특하다. 그것은 그저 ‘일본적’인 것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달리 무엇이라고 부를 마땅한 대상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일 일본 정부가 각의(국무회의)를 열어 이른바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우대 목록)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결정을 내릴 예정이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한달간 이어지고 있는 이번 사태를 대면하면서 고약하고 괘씸한 도발에 대한 감정적 울분이 터져나오는 건 당연하다. 한편으로는 이에 못지않게 국화와 칼이 상징하는, 미국을 그토록 혼돈과 의문에 빠뜨렸던 일본(인)은 누구인가 새삼 다시 묻게 된다. 누가 봐도 식민지배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이 명징하지만, 그 의도와 배경을 사뭇 식별하기 어렵다는 사정도 여전히 남아 있다. 처음에는 판결에 대한 대응이라고 했다가 전략안보물자 관리 문제라고 말을 바꾸는 등 ‘그러나 또한’을 되풀이하고 있다. 전략인지 아니면 일본적 습성에서 발원한 것인지, 많은 것들이 아직도 모호하다.

‘화이트리스트’ 제외에 대한 일본 국민 의견 수렴(퍼블릭 코멘트)에서 극히 이례적으로 4만여건이 폭발적으로 접수됐고 대부분 찬성 의견이었다고 한다. 아베 정부의 보복이 ‘평범한 일본인’의 생각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양국 국민은 역사 속에서 각각 한국인으로 또 일본인으로 살아간다. 식민지배-피지배 역사가 불에 탄 흔적처럼 민족과 개인의 몸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동시에 양국 국민은 지상에 함께 거처하는 인류로서의 윤리·양심을 그 본성으로 하는 코즈모폴리턴, 즉 ‘세계시민’이다. 국화를 가꾸면서도 칼을 숭배하는 일본인도 세계 시민이고 동북아 시민이다. 식민지배자의 위계에 짓눌려 강제노역에 동원됐던 뒤집힌 삶들에, 개인들의 어깨 위에 차별적으로 떨어진 고통·희생·절망에 세계 시민으로서 다소라도 윤리적이고자 하는 노력을 일본 사람들에게 요청할 뿐이다. 인간의 본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어쨌든 우리는 세계 시민으로서 서로의 관계를 도덕적으로 인식하고 설정할 수 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강제징용 노역을 한창 일삼았던 1940년대 같은 시기에 벌어진 아우슈비츠 강제노동·학살에 천착하며 ‘인간의 조건’을 준열하게 물었다. 그는 “나는 내 자신에게 하나의 문제가 되어버렸다”는 중세 교부철학자가 던진 난해한 말을 빌려, 지속적인 자기반성적 사유와 고통에 공감하는 선한 삶을 그 조건으로 설파했다. 보복과 불매·죽창·의병이 뒤엉키고 있는 지금 ‘일본적인’ 바로 그것이 일본인 스스로에게 하나의 자기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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