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①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
스포츠카 즐긴 부잣집 도련님
차별 알곤 <오리엔탈리즘> 출판
PLO 테러노선도 가차 없이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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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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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
지난달 중순 ‘오만해 유조선 피격’ 사건으로 중동은 1990년 걸프전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이란의 소행이라고 단정하는 미국 언론을 그대로 따르는 듯한 국내 보도도 많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의 자작극, 특히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는 빌미로 삼았던 ‘통킹만 사건’의 재판이라고 주장하는 이란 쪽 주장도 전해졌다. 1964년 통킹만 사태 때는 물론 1990년 걸프전 때도 우리는 미국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들어야 했다. 1991년 내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한 것은 그런 편견을 바꾸어보자는 하나의 시도였다.
책 제목을 ‘동양주의’나 ‘동양제일주의’로 오해한 사람들도 있고, ‘동양론’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꾸중한 영문학자도 있지만, 굳이 번역한다면 ‘동양에 대한 서양의 차별과 편견’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 말 2년쯤 하버드대학에 근무하면서 인종차별과 같은 오리엔탈리즘을 자주 경험했지만, 미국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하면서 나를 마조히스트로 보는 한국인도 많았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런 사람들이 한국에 돌아와 차별금지법에 반대하고 미국이나 유럽이나 일본을 무조건 찬양하는지도 모른다.
출판사 못 구해 애먹어
팔레스타인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사이드는 미국으로 유학해 하버드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부분의 부잣집 자녀들처럼 그 역시 엘리트주의에 젖어 비싼 스포츠카를 타고 다녔다. 1963년 스물여덟살에 미 컬럼비아대학교의 영문학 교수가 될 때까지 그는 정치에 무관심한 채 오로지 문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러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생기면서 변했다. 열세살이던 1948년 조국인 팔레스타인이 없어진 이후,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팔레스타인인이 나라 없는 ‘난민’이자 ‘테러리스트’로 불리고 자신을 정당하게 주장하기는커녕 언제나 비난받고 차별당해 왔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2천년 넘게 살아온 고향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강제로 쫓겨난 자민족이 <300> 같은 영화에서 보듯이 고대 이래 악당이나 변태로 왜곡되어 왔음을 안 것이다.
1977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국회 격인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PNC)의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1978~1979년의 레바논 내전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진력하는 가운데 1978년 <오리엔탈리즘>을 발표했다. 그 책에서 동양이란 우리가 보통 동양이라고 하는 한·중·일이나 아시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중동을 말한다. 즉 중동을 침략하고 지배하면서 서양이 중동의 이미지를 열등하고 사악한 것으로 조작한 것이 오리엔탈리즘이다. 자신의 처지는 물론이고 나라를 잃고 방랑하는 팔레스타인의 처지, 미국을 비롯한 서양으로부터 항상 멸시와 압박을 당하는 이슬람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그 원인이 된 오리엔탈리즘을 분노로 분석했으니 그 책은 단순히 학문적인 연구서가 아니라 차별받는 민족의 분노에서 나온 책이다.
내가 번역서 출판에 애를 먹은 것처럼 미국에서도 저자는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고, 어렵게 책이 나온 뒤에도 상당 기간 학계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 역시 오리엔탈리즘 탓이었다. 1978년은 물론 그 뒤 지금까지도 미국은 중동의 석유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 지배를 위해, 또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싸우는 이슬람 사람들을 “유대인을 학살하는 호전적, 폭력적, 광신적, 야만적 무리”라고 비난해왔기 때문이다. 사이드 역시 항상 살해 위협 속에 살아야 했다. 그가 평생 살면서 사랑한 코즈모폴리턴의 도시 뉴욕 사람들도 그를 보고 “테러범”이라고 욕했다. 그런 현상은 지금까지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도리어 9·11 사태 이후 더욱 심해졌다.
<오리엔탈리즘>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을 비판한 사이드는 여전히 유효하고 유용하며 유의미하다.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고 억압하기 위해 조작한 오리엔탈리즘의 역사, 정치, 학문, 예술, 문학 등 서양 문화 전반을 비판한 이 책은 어떻게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주의가 문학과 학문 또는 예술과 종교 등의 이름으로 조작되고, 제국주의적 권력지배와 결탁하여 식민지 민중을 착취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하고 있는지를 해부한 책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서구 정신의 허구와 위선에 대한 분노의 발로였으나, 기본적으로는 참된 ‘정신적 행동인’의 추구다.
그 책은 중동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의 침투를 분석한 것이었으나, 우리의 경우 과거의 일제강점기나 오늘의 근대화(=서양화=미국화=국제화=세계화)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일제는 서양을 모방하여 우리를 착취하고 조작한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이 서양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옥시덴탈리즘이 되기도 한다. 가령 개인주의나 물질주의의 서양에 대해 공동체주의와 정신주의의 동양이 우월하므로 동양이 서양을 구원하고 대체해야 한다는 식의 ‘동양주의’나 ‘동양제일주의’ 주장이다.
노엄 촘스키가 평한 대로 <오리엔탈리즘>은 우리가 ‘권력의 노예’가 아니라 ‘정신적 행동인’이 되기를 열망한다면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일제나 서양 같은 침략과 편견의 권력 주체에 대한 비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권력의 노예’였던 서양과 일제의 지식인이니 문화인이니 하는 자들과 달리 ‘정신적 행동인’, ‘정신적 자유인’인 지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 부동산 소유 안 해
사이드는 평생을 반권력의 휴머니스트로 살았다. 그래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테러 노선을 걷게 되자 그것을 철저히 비판하고 돌아섰다. 민족주의가 자기목적화하여 인종적 특성을 강조하고 민족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9·11 사태가 터지자 죄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극악무도한 테러를 저지른 점에 누구보다도 분노했고 규탄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이 황당한 추론을 통해 가공의 이슬람을 배후로 낙인찍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슬람을 제물로 삼는 점에 대해서는 더욱 분노했다. 그는 9·11 사태가 미국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원유 생산지인 아랍에 이율배반적으로 개입한 점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중동정책을 움직이는 핵심 원리다.
사이드가 말했듯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이스라엘이라는 ‘희생자의 희생자’가 되었지만 세상은 모른체하고 있다. 특히 우리에게 팔레스타인은 너무나 멀다. 지리적으로도 멀지만 마음으로나 머리로는 더욱더 멀다. 책방에 가거나 도서관에 가면 이스라엘 관련 책이 넘쳐나는 반면 팔레스타인 책은 그야말로 극소수고 대부분 이스라엘 편에서 팔레스타인을 비난하는 책들뿐이다. 사이드가 쓴 <팔레스타인 문제>, <이슬람 보도>, <피해자 비난하기> 등 팔레스타인과 중동에 대한 책들은 우리말로 전혀 번역되어 있지 않고, 그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기껏 문화비평 수준에 그치고 있다.
사이드의 모든 책은 본질적으로 정치권력과 결탁한 문화권력, 즉 학문권력, 언론권력, 문학권력, 예술권력 등등에 대한 비판의 책이다. 그는 지식인이란 모름지기 권력에 맞서서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제로 평생 그렇게 살았다. 죽기까지 40년을 오로지 교수로 살면서 평생 부동산을 전혀 소유하지 않고 방랑자처럼 살았다. 삶과 학문이 그처럼 일치하는 경우를 좀처럼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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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가 지난해 8월17일 경북 경산시 당음리 자택에서 <한겨레> 인터뷰하고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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