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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7 20:13 수정 : 2019.08.07 20:34

김보통의 해 봤습니다

배가 고파 햄버거를 포장해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이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난감했습니다. 급한 대로 종이봉투 안에서 햄버거를 꺼낸 뒤 빈 봉투를 머리에 뒤집어썼습니다. 이번엔 들고 있던 햄버거가 비에 젖었습니다. 별수 없이 포장을 벗겨 선 채로 먹었습니다. 우스운 꼴이지만,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빗발은 점점 거세져 종이봉투로는 더는 어찌해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그제야 편의점에 들어가 우산 하나를 샀습니다. 육천오백원짜리 가장 싼 것이었습니다. 쓰고 있던 종이봉투를 버린 뒤 우산을 펼쳐 들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쾌적했습니다. 나름의 운치도 있었습니다. 앞서 걸어가는 할머니가 전단 한 장을 머리 위에 올린 채 폭우 속을 걸어가는 것을 보기 전까진 말입니다.

할머니는 저보다 십미터 정도 앞서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갔다 오시는 것인지 화사한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채였는데, 당연히 비에 젖어 있었습니다. 머리 위에 올라간 전단은 애초에 그 용도를 상실했는데도 할머니는 한 손으로 전단 귀퉁이를 꼭 잡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습니다. ‘다가가 우산을 같이 쓰자고 말씀드려볼까?’ 하지만 망설여졌습니다.

우선, 비가 곧 그칠지 모릅니다. 워낙 소나기가 많이 내리는 시기라 지금 내리는 비가 앞으로 얼마나 내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괜스레 멋쩍은 순간이 연출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 피하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할머니의 목적지가 어디까지인지를 모릅니다. 같이 쓰고 가던 중에 “그럼 저는 여기서 이만 가보겠습니다”라고 하거나, “이 우산은 가져가세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또한, 할머니가 원치 않을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열일곱살 이후로 나이를 세는 걸 포기한 저지만, 남들이 볼 땐 그저 시커먼 아저씨일 뿐이라 불쑥 다가간다는 것 자체가 위협이 될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제 돈으로 산 우산이었습니다. 비록 편의점에서 파는 우산 중 가장 싼 우산이었으나 어찌 됐든 제가 노동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산 제 우산이기에, 그 편익은 저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맞다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우리는 횡단보도 앞에 나란히 발을 멈췄습니다. 할머니는 이미 온몸이 비에 젖은 채였습니다. 여전히 머리 위에 올라간 전단은 물에 녹아 흐물흐물해져 있었습니다. 제가 우산을 나눠 쓰지 말아야 할 온갖 이유를 찾는 사이 벌어진 일입니다.

“우산 같이 쓰실래요?”

저는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빙긋 웃더니 “고마워요”라고 말하며 우산 안으로 들어 오셨고, 저는 우산을 할머니 쪽으로 기울였습니다. 그 바람에 한쪽 어깨가 비에 젖어들었으나 그만큼 할머니는 비를 덜 맞을 수 있었겠지요. 횡단보도를 건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한 주택 앞에서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셨고, 그제야 저도 홀로 우산을 쓴 채 작업실로 돌아왔습니다. 거울을 통해 살펴보니 제 어깨는 생각보다 많이 젖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말할 걸’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랬다면 할머니는 지금보다 비를 덜 맞았을 테니까요. 뜬금없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누군가 굶는 이유가 무엇일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작업실에 놓여있던 우산은 며칠 뒤 누군가 가져갔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비가 오지 않으니 별 신경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글·그림 김보통(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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