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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5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사토 구니 주유네스코 일본대사가 한국인의 강제 노역 사실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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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종족주의’ 반박 특별기고
② 강제징용
2015년 유네스코 일본 대사도
“한국인 공제노역“ 공식 인정
이우연, 일제 총동원령 눈감고
편향된 자료 근거로 억지 왜곡
강제성 없이 자유로웠다?
현장 이탈자를 ‘도주’로 표현
임금 정상적으로 지불했다?
일본인보다 적고 공제는 갑절
일본 돈벌이가 로망이었다?
강제노역 저항, 경찰과 전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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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5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사토 구니 주유네스코 일본대사가 한국인의 강제 노역 사실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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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일본은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하에서 강제로 노역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도 징용 정책을 시행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다.”
2015년 7월5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제철·제강·조선·석탄산업’ 등재와 관련해 사토 구니 주유네스코 일본대사가 했던 공식 발언 중 일부이다. 이 발언은 일본이 최초로 국제기구에서 아시아태평양전쟁(1931~1945)의 강제동원을 공식 인정한 사례다. 물론, 일본 정부는 사토의 발언 하루 만에 강제성을 부정했다. 일본 정부도 발언의 무게감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일부 언론의 보도처럼 일본이 “의외로 강제노역을 순순히 인정”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2015년 2월부터 ‘강제’(forced)라는 용어를 넣기 위해 우리 외교부와 함께 고군분투했다. 일본 정부는 완강했다. ‘23개 시설지에 징용된 한국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모집이나 관 알선(관청의 소개와 지원)이 강제동원이냐’며 항변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 정부는 인정했다.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강제동원은 일본 국가권력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운영한 체제라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단 한 명이라도 피해자가 있다면 강제동원은 있었던 사실’이라는 우리 쪽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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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조선총독부가 일본 홋카이도에 동원된 조선인들에게 보낸 편지. 1939년부터 2년 기한으로 모집·동원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된 조선인들에게 조선총독부는 “도망가는 일 없이 산업전사로 일하라”, “돌아오지 말고 성실히 일하라”라고 적었다. 정혜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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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태평양전쟁은 조선 민중이 처음으로 경험한 근대 전쟁인 동시에 모든 국력을 투입한 총동원 전쟁이었다. 총동원 전쟁의 사상적 토대인 ‘총력전’ 사상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적으로 확산된 근대 전쟁관이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 프랑스가 처음 총력전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일본은 이 총력전 사상을 받아들여 국가총동원체제를 확립했다. 1918년 4월, 육군의 독려 아래 내각은 군수공업동원법을 제정하고, 6월에는 군수국을 신설했다. 군수공업동원법은 총력전 수행을 위해 평상시부터 인력, 물자, 자금 등 전 국가의 자원을 조사하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보급 계획을 세우도록 하는 법이었다. 1919년 12월에는 군수조사령을 제정해 식민지인 ‘조선과 대만’을 조사 대상 지역에 포함했으며 1925년 4월 국가총동원기관설치위원회를 설치했다. 이러한 행보는 아시아 침략이 본격화되며 더욱 빨라졌다. 1937년 중일전쟁 후,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국가총동원체제를 확립했다.
국가총동원체제는 일부 군 장성들이 운영한 체제가 아니었다.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해 약 860개의 법령(개정 포함)과 제도, 조직을 통해 운영한 시스템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해당 부서를 설치하고 지방 단위까지 조직을 완비했다. 이는 모두 1970년대부터 일본에서 나온 자료집과 연구로 밝혀진 내용이다. 국가총동원법과 하부 법령은 ‘국민동원’을 명시했고, 매년 국민동원계획수를 설정했다. 취업이 아니라 ‘동원’이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상호 계약관계에 따른 노동자가 사라지고 일방적 의무만 남은 노무자의 시절이다.
우리 정부가 ‘강제’를 넣고자 고군분투하던 2015년 봄, 국내 언론사에 직접 보도자료를 보낸 연구자가 있었다. 성균관대 경제학과 출신 이우연 박사였다. 방대한 공개자료와 연구 성과를 외면하고, 편향적으로 취사선택한 자료를 근거로 한 왜곡된 주장이었다. 그가 <반일 종족주의>에 수록한 내용과 동일하다. 당시 국내 언론에는 간단히 보도했으나, 이후 일본의 극우 성향 <산케이신문>에는 자세히 실렸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반일 종족주의>에서 그는 강제동원을 부정한다. ‘1910년에 조선인은 일본의 신민이 되었으므로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와 ‘아태전쟁기의 동원은 법적 근거에 따라 이루어진 합법 행위’라는 인식을 토대로 해서다. 강제동원은 일본 제국주의 전반에 걸친 정책으로, 이미 국제노동기구(ILO)의 협약을 스스로 어긴 행위이므로 차별과 무관하다. 또한 법적 차별이 없었다는 평등론도 오류다. 1910년 이후 조선인은 의무상 일본인이지만 권리에서는 일본인과 구별되는 존재로 취급됐다. 이미 2000년대 밝혀진 법제사 연구의 일관적인 결론이다.
이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앞에서 설명한 일본의 국가총동원체제를 도외시했다는 점이다. 그밖에도 통계의 배경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제국 운영 실태, 일본 지역 일반 도일자(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와 이입노무자 구분, 직종별 노동실태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 1938년 이전에 100만명에 이르던 일반 도일 조선인과 동원 정책에 따른 강제동원 조선인을 구분하지 못하고, 탄광 현장에 대해서도 근거 없이 주장을 폈다. 나는 일본 규슈의 지쿠호와 나가사키탄전, 조반탄전, 홋카이도의 탄전들, 남사할린과 만주의 탄전까지 갱내를 직접 돌아봤다. 이 박사의 “1930년대가 되면 일본 탄광 대부분의 갱도는 사람 키를 훨씬 넘는 높이와 5미터 이상의 폭을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표현은 황당 그 자체이다. 그런 탄광이 일본에 몇 군데나 있었단 말인가.
이같은 이우연 박사의 억지 주장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지만 역사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을 위해 설명하는 것이 연구자의 몫이다. 지면의 한계로 몇 가지만 이야기해보려 한다.
“생활은 대단히 자유로웠다.” 강제성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 박사는 이 주장의 근거를 밝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상식적 질문을 해보자. 당시 모든 일본 정부와 기업의 자료는 현장 이탈자를 “도주했다”고 명시했다. 왜 퇴사가 아닌 도주라 표현하고, 도주자를 잡아다가 린치를 가해 목숨까지 앗아갔는가. 당국은 공장과 탄광을 관리하는 감독기관을 설치하고 노무자의 통제와 관리를 담당했다. 집단 농장도 예외가 없었다. 미국의회도서관이 소장한 자료 중엔, 중서부태평양지역(당시 남양군도)의 국책회사인 남양흥발이 노동시간과 작업량을 기록해 매일 경찰주재소에 제출한 보고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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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13년8개월 만에 피해자들의 승소 판결이 난 지난해 10월30일 오후 대법원 앞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94)씨가 소감을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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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조선인 가릴 것 없이 임금은 정상적으로 지불했다.” 전시체제기의 임금 체제를 평시와 동일하게 인식하는 것도 문제지만, 오류는 실제 수령한 인도금액에 있다. 이 박사는 “공제금은 조선인이 58원으로 일본인의 26원보다 월등히 많았고, 저금도 조선인의 금액이 많았으므로 인도금액에서 큰 차이”가 나타났다며 민족별 차별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조선인은 임금의 4할 이상을 직접 건네받았고, 그 돈으로 소비를 하거나 송금할 수 있었다”고 단정했다. 인도금액에서 일본인과 차이가 있었지만 ‘정상적 지불’이었다는 평가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또한 이 박사가 일본인과 임금 차별이 없었다며 제시한 임금대장에서도 조선인의 월수입은 일본인보다 적었다.
“당시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다.” 좋은 돈벌이로 생각하고 갔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따지기에 앞서 근본적인 문제부터 생각해보자. 속임에 넘어갔더라도 좋은 돈벌이로 생각하고 갔다면 강제성이 사라지는가. 그렇지 않다. 돈벌이에 속은 개인의 탓이 아니라 속임수를 써서 인력을 동원한 체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과 독일 등 추축국은 돈벌이와 좋은 직장이라는 ‘당근’을 주로 사용했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 일본으로 돈벌이 갈 기회가 열렸고 공장에서 기술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신이 나서 ‘연락선 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갔다는 사람들은 있었다. 이 사례만으로 “로망”이라 표현했다면 다른 사례를 보자. 1939년부터 조선 민중의 이탈은 시작되었다. 탈출자는 1939년엔 전체의 5.2%인 2천명이었으나 이 숫자는 1940년에는 37.2%로, 1943년에는 40%로 늘었다. 일본 땅에 도착해도 포기하지 않고 수송열차에서 뛰어내리다 목숨을 잃기도 했다. 1944년 초에는 저항이 더욱 격렬해져서 징용령서(징용통지서)를 전달하러 찾아온 관헌을 폭행하고, 경북 경산군에 사는 청장년 27명은 ‘결심대’를 결성해 죽창과 낫을 들고 20일간 산에서 항거하며 경찰과 접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고등법원검사국 자료와 제85회 제국의회 설명자료 내용이다. “로망”인데, 왜 탈출을 하고 관헌을 폭행하며 집단 항거했는가.
만약 학문적 목적 이외에 다른 의도가 없이 연구자로서 성실함과 자기 고민만이 있었다면 이와 같은 무책임한 일반화는 불가능하다. 성실하지도 실증적이지도 않은 주장은 사실의 무게를 어떻게든 외면하려는 편협함만을 드러냈다. <반일 종족주의>는 학자의 외피를 쓴 정치 행위의 결과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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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정혜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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