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3.23 23:07
수정 : 2018.03.23 23:12
이명석
문화비평가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구청에서 여는 집밥 요리 교실을 신청하려고 전화했다. 그런데 접수처에서 계속 되물었다. 진짜 수업을 들을 거냐고. 뭔가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걸까? “수업이 어려운가요? 자리가 부족한가요?” 잠시 멋쩍은 침묵 사이로 서류 뒤적이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아직 한 명도 없거든요.”
전화를 끊고 나니 슬그머니 불안감이 생겼다. 내가 눈치가 없는 걸까? 암묵적인 여자들만의 리그에 억지로 들어가려는 걸까? 하지만 참가 대상엔 ‘성인’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러다 또 다른 물음표가 생겼다. 왜 남자들은 이런 기회를 안 챙길까? 정작 집밥 요리 교실이 필요한 건 그쪽이잖아. 평생 밥 한 끼 차려본 적 없다 독립하는 1인 가구 남성, 중장년의 이혼남, 기러기 아빠들이야말로 이 수업을 들어야지.
나는 이런 일회성 수업을 좋아한다. 학원이나 동호회에서 본격적으로 파기 전에, 놀이 반 공부 반으로 부담 없이 배워볼 기회를. 그래서 서촌의 화원에서 야생화 가꾸기를 익혔고, 건축가의 한옥에서 교자 만드는 법을 배웠고, 백년 전에 만든 하수도를 탐험하며 바퀴벌레 가족의 단잠을 깨우기도 했다. 반대로 내가 커플 댄스, 마작 게임, 만화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거의 언제나 수강생의 다수는 여자였다. 심지어 어느 학교 강의 때는 여학생 백명에 남학생 두명인 경우도 보았다. 커플 댄스엔 여자들끼리 손을 잡고 왔다. 남자들은 그 시간에 뭘 하고 있을까?
몇년 전 여의도의 기업체에서 특이한 강의 요청을 받았다. “우리 직원들 휴가 좀 가라고 해주세요.” 주어진 휴가도 다 안 쓰고, 수당으로만 챙겨가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거였다. 예상대로 직원 대부분은 30~50대 남성들이었다. 나는 제대로 안 놀면 일의 능률도 안 오르고, 번아웃과 돌연사가 기다린다고 겁을 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뭘 하고 놀죠?” 어릴 때부터 너무 성실하게 살아와 빈 시간이 생기면 뭘 할지 모르겠단다. “누구하고 놀죠?” 신혼 때는 부인, 그다음엔 아이와 놀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양쪽 다 자신을 귀찮아한단다.
그 후 남자들을 만날 때마다 물어봤다. “주말엔 뭐 하세요?” “스포츠 중계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죠.” 남들 노는 걸 보며 노는 척하는 것도 방법이다. “골프도 치고 등산도 가고 그러죠.” 자연스러운 듯하지만 편향되어 있었다. 남자들은 직장이나 학교 선후배라는 서열을 유지하면서, 사회생활의 연장이라는 강박을 가지고, 술을 첨가해서 노는 걸 선호했다. 낯선 환경에 들어가, 다른 종류의 사람을 만나고, 무언가를 배우며 노는 데는 서툴렀다.
그러고 보니 요즘 이런 남자들이 있다고 한다. 여자 가수가 ‘걸스 캔 두 애니싱’ 문구를 들었다고, 여성의 삶을 돌아보는 소설을 읽었다고 시비를 건단다. 혹시 스스로 뭔가를 하는 것보다 여자들이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걸까? 제발 고무줄 끊기는 이제 그만두자. 스스로를 낡은 펜스 속에 가두지 말자.
예전 미국 브루클린에서 본 동네 댄스 교실이 생각난다. 오후 체육관엔 미취학의 꼬마, 배 나온 아저씨, 허리 굽은 할머니까지 자유로운 복장으로 어울려 있었다. 서로 손잡고 빙글빙글 도니 금세 친구가 되었다. 우리의 집밥 교실도 이런 모습이면 좋겠다. 나이도 성도 직업도 상관없이 같이 지지고 볶고 먹고 노는 곳. 그러니 일단은 나부터다. 유일한 준비물인 앞치마를 멋진 걸로 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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