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가 사월의 마지막 날 밤에 용산역에 나가볼까 한다. 만나야 할 이가 있는데, 사람이 아니라 기차다. 도착하는 기차인데, 마중이 아니라 배웅이다. 한때 한반도에서 가장 빨리 달리던 기차였던 새마을호가 익산에서 용산까지 마지막 운행을 한다. 귀한 표는 일찌감치 매진이 되었다니, 종착역 귀퉁이에서 눈인사를 할 수밖에 없다. 도착 예정 시각은 오후 11시11분, 기찻길 모양의 아름다운 숫자다. 케이티엑스(KTX)에 길을 양보하느라 늦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또한 운명에 어울린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기차를 많이 탔다. 고향 마을은 버스보다 기차가 편했다. 대구로 통학하기도 했는데, 토요일엔 동성로에서 놀다 비둘기호 막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대구역에서 9시 반쯤 떠나는 그 열차는 밤새 경부선의 모든 역을 거쳐 다음날 새벽 용산역에 도착한다고 들었다. 불편한 밤차였지만 꼭 이걸 타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빚잔치로 야반도주하는 이와 가출 청소년이었다. 그게 가장 싼 요금으로 서울로 가는 방법이었다. 시골이 지겨웠던 한 학생이 야간 비둘기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깜깜한 밤을 천천히 달리다 이름 모를 역에 한참 서 있곤 했다. 그러면 옆으로 다른 기차들이 굉음을 울리며 지나쳐 갔다. 얄밉고도 부러웠다. 언젠가 금의환향할 때는 저 기차를 타고 돌아와야지.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더니 승무원이 종착역에 왔다고 깨웠다. 으슬으슬한 용산역 밖으로 나갔다. 그때 담임이 불쑥 나타나 귀를 잡아당겼다. “쌤, 우째 이리 빨리 왔심니꺼.” “우째? 귀신 잡는 새마을호 타고 왔다.” 학생이 탔던 비둘기가 먼저 사라졌고, 선생이 탔던 새마을이 이제 사라진다. 나는 여권이 생기자 여러 대륙의 기차를 타러 다녔다. 유레일패스 시간표를 들고선 이런 게임을 했다. 제한된 시간에 가능한 한 다양한 기차를 타자. 알프스를 유람하는 파노라마 열차, 체코와 독일 국경을 넘는 꼬마 열차, 집시들이 들끓는 이탈리아의 야간 컴파트먼트… 파리 동역에서 기차를 놓쳤을 때는 아무 기차나 올라탔다. 헝가리로 달리던 그 기차는 ‘오리엔트 특급’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남북이 잘린 나라 안에서는 그런 여행이 불가능하다. 그래도 때때로 기차를 만나러 간다. 정선선의 한 량짜리 꼬마 열차가 사라진다고 해서 아우라지로 엠티를 갔던 적도 있다. 얼마 전엔 양산에 강연을 갔다가, 어릴 때 동대구에서 경주를 거쳐 해운대로 갔던 기억이 났다. 이번엔 그 반대 노선으로 울산 태화강역에서 경주로 가 하루 묵고 동대구로 갔다. 역마다 기념 스탬프 도장도 받았다. 새마을호는 지난해 신례원에 갈 때 마지막으로 타보았다. 정규 노선에서 사라지는 새마을호는 내구연한이 다 돼 모두 폐차된다고 한다. 안전이나 경제성을 따지자면 당연한 수순이겠지. 그런데도 이런 미련을 가져본다. 어딘가 일주일에 딱 한 번 비둘기호나 새마을호가 달리는 노선을 남겨두면 어떨까? 겉모습은 가능한 한 바꾸지 말고, 내부는 깨끗하게 관리하고, 옛날처럼 도톰한 종이 표를 찍어준다. 나는 강릉행 케이티엑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조금 전 서울역에서 리옹역과 자매결연을 맺었다며 유레일패스를 파는 걸 봤다. 남북 정상회담으로 평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끊어진 철도를 이어 평양, 러시아, 유럽에 이르는 꿈도 가능해 보인다. 그 열차를 거꾸로 타고 온 친구들에게 주고 싶다. 번쩍거리는 케이티엑스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낡았지만 사랑스러운 기차를 탈 기회를.
칼럼 |
[삶의 창] 11시11분에 멸종하는 기차 / 이명석 |
문화비평가 사월의 마지막 날 밤에 용산역에 나가볼까 한다. 만나야 할 이가 있는데, 사람이 아니라 기차다. 도착하는 기차인데, 마중이 아니라 배웅이다. 한때 한반도에서 가장 빨리 달리던 기차였던 새마을호가 익산에서 용산까지 마지막 운행을 한다. 귀한 표는 일찌감치 매진이 되었다니, 종착역 귀퉁이에서 눈인사를 할 수밖에 없다. 도착 예정 시각은 오후 11시11분, 기찻길 모양의 아름다운 숫자다. 케이티엑스(KTX)에 길을 양보하느라 늦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또한 운명에 어울린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기차를 많이 탔다. 고향 마을은 버스보다 기차가 편했다. 대구로 통학하기도 했는데, 토요일엔 동성로에서 놀다 비둘기호 막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대구역에서 9시 반쯤 떠나는 그 열차는 밤새 경부선의 모든 역을 거쳐 다음날 새벽 용산역에 도착한다고 들었다. 불편한 밤차였지만 꼭 이걸 타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빚잔치로 야반도주하는 이와 가출 청소년이었다. 그게 가장 싼 요금으로 서울로 가는 방법이었다. 시골이 지겨웠던 한 학생이 야간 비둘기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깜깜한 밤을 천천히 달리다 이름 모를 역에 한참 서 있곤 했다. 그러면 옆으로 다른 기차들이 굉음을 울리며 지나쳐 갔다. 얄밉고도 부러웠다. 언젠가 금의환향할 때는 저 기차를 타고 돌아와야지.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더니 승무원이 종착역에 왔다고 깨웠다. 으슬으슬한 용산역 밖으로 나갔다. 그때 담임이 불쑥 나타나 귀를 잡아당겼다. “쌤, 우째 이리 빨리 왔심니꺼.” “우째? 귀신 잡는 새마을호 타고 왔다.” 학생이 탔던 비둘기가 먼저 사라졌고, 선생이 탔던 새마을이 이제 사라진다. 나는 여권이 생기자 여러 대륙의 기차를 타러 다녔다. 유레일패스 시간표를 들고선 이런 게임을 했다. 제한된 시간에 가능한 한 다양한 기차를 타자. 알프스를 유람하는 파노라마 열차, 체코와 독일 국경을 넘는 꼬마 열차, 집시들이 들끓는 이탈리아의 야간 컴파트먼트… 파리 동역에서 기차를 놓쳤을 때는 아무 기차나 올라탔다. 헝가리로 달리던 그 기차는 ‘오리엔트 특급’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남북이 잘린 나라 안에서는 그런 여행이 불가능하다. 그래도 때때로 기차를 만나러 간다. 정선선의 한 량짜리 꼬마 열차가 사라진다고 해서 아우라지로 엠티를 갔던 적도 있다. 얼마 전엔 양산에 강연을 갔다가, 어릴 때 동대구에서 경주를 거쳐 해운대로 갔던 기억이 났다. 이번엔 그 반대 노선으로 울산 태화강역에서 경주로 가 하루 묵고 동대구로 갔다. 역마다 기념 스탬프 도장도 받았다. 새마을호는 지난해 신례원에 갈 때 마지막으로 타보았다. 정규 노선에서 사라지는 새마을호는 내구연한이 다 돼 모두 폐차된다고 한다. 안전이나 경제성을 따지자면 당연한 수순이겠지. 그런데도 이런 미련을 가져본다. 어딘가 일주일에 딱 한 번 비둘기호나 새마을호가 달리는 노선을 남겨두면 어떨까? 겉모습은 가능한 한 바꾸지 말고, 내부는 깨끗하게 관리하고, 옛날처럼 도톰한 종이 표를 찍어준다. 나는 강릉행 케이티엑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조금 전 서울역에서 리옹역과 자매결연을 맺었다며 유레일패스를 파는 걸 봤다. 남북 정상회담으로 평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끊어진 철도를 이어 평양, 러시아, 유럽에 이르는 꿈도 가능해 보인다. 그 열차를 거꾸로 타고 온 친구들에게 주고 싶다. 번쩍거리는 케이티엑스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낡았지만 사랑스러운 기차를 탈 기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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