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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2.28 18:12 수정 : 2018.12.28 19:36

이명석
문화비평가

토요일 밤 버스 회사에 전화해본 적 있는가? 없다면 그럴 일을 만들지 마라. 분명 당신 가슴은 무언가에 파먹히고 있을 거다. 응답은 쉽게 오지 않는다. 주말이라 아무도 없는 걸까? 월요일에나 연락이 된다면, 과연 그게 남아 있을까? 그러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공손하게 말했다. “제가 시내버스에 두고 내린 물건이 있어서요.” 무덤덤한 질문이 돌아왔다. “뭔데요?” “종이 가방 안에 든 만화책인데요.” “마…안…화요?” 저쪽의 긴장감이 확 떨어졌다. “저한테는 아주 소중한 물건입니다.” “기다려보세요.”

몇달 전, 진행하는 일 때문에 만화 <은하철도 999>의 한국어판을 구해야 했다. 그런데 이미 절판된 상태였다. 일반 서적은 도서관 여기저기를 뒤지면 어떻게든 나온다. 하지만 만화책은 아무리 대단한 명성을 누렸더라도 절판과 동시에 찾을 길이 없어진다. 그러다 어렵게 수소문해 소장가를 찾았다. 그분은 아무런 조건 없이 ‘깨끗이 보고 돌려만 달라’며 시리즈 전권을 보내주셨다. 이제 그 작업이 거의 마무리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만화를 집에 가져다 두려고 들고 나왔는데, 버스에서 내리니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거다. 나는 스쿠터를 타고 지나온 장소를 하나씩 되짚어갔다. 어디에도 없었다. 남은 희망은 버스뿐이었다.

새 책을 구할 수 있으면 당연히 사서 돌려드려야지. 하지만 그럴 수 있다면 애초에 빌릴 필요도 없었다. 일본어판은 지금도 판매 중이고, 나도 그걸 같이 보며 작업했다. 하지만 아무리 초호화판이더라도 소장가가 빌려준 그 만화들을 대체할 수는 없다. 나는 차가운 길바닥에서 스마트폰으로 방법을 찾아보았다. 어라, 중고서점에 올라와 있네. 표시된 가격이 싸지는 않지만 어떻게 해볼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권당 가격이었고, 시리즈는 모두 20권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매물도 없었다.

버스 회사에선 소식이 없었다. 아무래도 버스가 차고지에 도착해야 알 수 있으려나? 나는 대중교통 앱을 눌렀다. 차량번호는 아까 확인해두었다. 내가 탔던 버스는 한강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나서, 토요일 밤의 강남을 비틀비틀 기어 회사에 도착했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조금 기다렸다 다시 걸었다. 받지 않았다. 몸을 배배 꼬다가 다시 걸었다. 버스 회사 직원은 스토리텔링의 법칙을 잘 알았다. 두번 실패한 뒤, 세번째 성공하게 하라. “천 가방이 하나 들어왔네요. 안에 떡도 있고요.”

곧바로 버스를 탔다. 생각해보니 종이 가방이 약해 보여 천 가방에 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떡이라고 한 건, 아까 산 단호박 카스텔라겠지? 버스는 앱으로 보았던 그 꾸불꾸불한 노선을 따라갔다. 서울의 남쪽을 구석구석 핥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술꾼들을 집으로 실어 보냈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잡념이 생긴다. 혹시 가방을 착각한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만화책을 확인한 것도 아니야. 게다가 그게 진짜 떡이라면?

나는 불안이라는 노선의 버스를 타고 있었다. 창밖으로 은하철도 999를 탄 철이가 보이는 듯했다. 소년의 마음엔 의문이 가득하겠지. 저 먼 안드로메다에 가면 내가 꿈꾸던 걸 찾을 수 있을까? 그런데 가지 않으면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인생은 언제나 알 수 없고, 의심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하지만 토요일 밤 버스에 놓고 내린 만화책을 되찾아올 수 있다는 믿음이 작동한다면, 그러면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 나는 지구의 끝 같은 버스 종점에서 그 믿음을 찾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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