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가 언젠가 독서캠프에 초대되어 작가 몇명과 단상에 올랐다. 처음 마이크를 잡은 분은 자신이 매우 힘들게 시간을 쪼개 여기에 왔다고, 드라마 로케이션을 위해 외국에 갔다가 공항에서 바로 왔다고 했다. 하루에 세 시간도 못 자고 있는데, 오는 도중에도 연락이 와서 쪽대본을 고쳐야 한다고도 했다. 한 독자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어릴 때 죽을 정도로 맞으며 힘든 시절을 보냈는데, 지금 버는 정도로 돈이 많았으면 책 같은 건 쓰지 않았을 거라고. 비장미가 흘러넘치는 말씀이었다. 내가 다음으로 마이크를 잡아야 했다. 이 무거운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미리 받은 질문지 하나를 꺼냈다. “작가님의 좌우명은 무엇인가요?” “나의 좌우명은… ‘무리하지 말자’입니다.” 평소 성격이 그렇긴 하지만, 굳이 강조해서 말했다. “공부든 일이든 밤새워 하진 말자. 딴 사람을 밤샘시킬 일도 만들지 말자. 꼭 누구를 밟고 이겨야 하면 피해 가자. 뭐 이런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모양입니다.” 간간이 웃음이 터졌다. 몇개의 질문을 더 받은 뒤, 이렇게 마무리했다. “나는 어떤 일을 할까 말까 고민할 때 이런 가정을 합니다. 내가 돈이 엄청 많아, 아무 일 안 해도 먹고살 정도로 돈이 아주 많아. 그래도 이 일을 하고 싶을까?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글을 쓰고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글 쓸 때가 제일 행복하니까요. 이렇게 책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고요.” 나중에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다. 반응이 이랬다. “저격했네.” “아니,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저격이네.” 나는 혐의를 부정하기 어려웠다. 왜 그랬을까? 초대받은 저자들끼리 부딪히는 모습을 보이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모욕받은 느낌이었다. 세상에는 제각각의 삶 속에서 태어난 제각각의 가치관들이 있다. 나는 그 작가의 주장도 귀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그의 말은 분명히 어떤 이들에게는 감동의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성공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 자신의 불행을 보상받을 기회를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불행을 뒤집은 성공학 강좌’, ‘돈 잘 버는 작가 되는 법’ 같은 제목의 강연에는 잘 어울렸을 거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스타 작가, 스타 강사가 된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거기엔 나 말고도 여러 작가들이 있었다. 오직 책 때문에 모인 수백명의 독자가 있었다. 자기 책의 존재 가치를 무시하는 그의 말은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를 무시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성공에 이르지 못할,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미래를 부정했다. 캠프의 밤이 깊어지자, 교사 한분이 나를 찾아왔다. “이런 걸 여쭤봐도 될지?” 선생님은 마음의 병을 앓는 제자에 대해 말했다. 어릴 때부터 심한 폭력에 시달렸고, 극단적인 시도를 해서 시설에 들어가 있다고. “그야말로 벼랑 끝에 있는 아이인데요. 그림을 그려요. 제가 뭘 해줄 수 있을까요?” 나는 좌우명과 달리 그날 밤 잠을 설쳤다. 다음날 아침, 캠프를 정리하던 선생님을 찾았다. 그 아이와 비슷한 아픔을 겪은 아웃사이더 예술가들의 이름을 전하고, 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혹시 아이가 그림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면 알려주세요.” 그가 자신의 불행을 대가로 놀라운 예술을 펼치길 기대해서가 아니다. 오직 ‘평범’을 위해 애쓰고 있는 아이가 그림으로 전하는 말을 들어주고 싶다.
칼럼 |
[삶의 창] 무리하는 건 제게 무리입니다만 / 이명석 |
문화비평가 언젠가 독서캠프에 초대되어 작가 몇명과 단상에 올랐다. 처음 마이크를 잡은 분은 자신이 매우 힘들게 시간을 쪼개 여기에 왔다고, 드라마 로케이션을 위해 외국에 갔다가 공항에서 바로 왔다고 했다. 하루에 세 시간도 못 자고 있는데, 오는 도중에도 연락이 와서 쪽대본을 고쳐야 한다고도 했다. 한 독자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어릴 때 죽을 정도로 맞으며 힘든 시절을 보냈는데, 지금 버는 정도로 돈이 많았으면 책 같은 건 쓰지 않았을 거라고. 비장미가 흘러넘치는 말씀이었다. 내가 다음으로 마이크를 잡아야 했다. 이 무거운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미리 받은 질문지 하나를 꺼냈다. “작가님의 좌우명은 무엇인가요?” “나의 좌우명은… ‘무리하지 말자’입니다.” 평소 성격이 그렇긴 하지만, 굳이 강조해서 말했다. “공부든 일이든 밤새워 하진 말자. 딴 사람을 밤샘시킬 일도 만들지 말자. 꼭 누구를 밟고 이겨야 하면 피해 가자. 뭐 이런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모양입니다.” 간간이 웃음이 터졌다. 몇개의 질문을 더 받은 뒤, 이렇게 마무리했다. “나는 어떤 일을 할까 말까 고민할 때 이런 가정을 합니다. 내가 돈이 엄청 많아, 아무 일 안 해도 먹고살 정도로 돈이 아주 많아. 그래도 이 일을 하고 싶을까?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글을 쓰고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글 쓸 때가 제일 행복하니까요. 이렇게 책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고요.” 나중에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다. 반응이 이랬다. “저격했네.” “아니,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저격이네.” 나는 혐의를 부정하기 어려웠다. 왜 그랬을까? 초대받은 저자들끼리 부딪히는 모습을 보이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모욕받은 느낌이었다. 세상에는 제각각의 삶 속에서 태어난 제각각의 가치관들이 있다. 나는 그 작가의 주장도 귀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그의 말은 분명히 어떤 이들에게는 감동의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성공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 자신의 불행을 보상받을 기회를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불행을 뒤집은 성공학 강좌’, ‘돈 잘 버는 작가 되는 법’ 같은 제목의 강연에는 잘 어울렸을 거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스타 작가, 스타 강사가 된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거기엔 나 말고도 여러 작가들이 있었다. 오직 책 때문에 모인 수백명의 독자가 있었다. 자기 책의 존재 가치를 무시하는 그의 말은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를 무시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성공에 이르지 못할,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미래를 부정했다. 캠프의 밤이 깊어지자, 교사 한분이 나를 찾아왔다. “이런 걸 여쭤봐도 될지?” 선생님은 마음의 병을 앓는 제자에 대해 말했다. 어릴 때부터 심한 폭력에 시달렸고, 극단적인 시도를 해서 시설에 들어가 있다고. “그야말로 벼랑 끝에 있는 아이인데요. 그림을 그려요. 제가 뭘 해줄 수 있을까요?” 나는 좌우명과 달리 그날 밤 잠을 설쳤다. 다음날 아침, 캠프를 정리하던 선생님을 찾았다. 그 아이와 비슷한 아픔을 겪은 아웃사이더 예술가들의 이름을 전하고, 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혹시 아이가 그림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면 알려주세요.” 그가 자신의 불행을 대가로 놀라운 예술을 펼치길 기대해서가 아니다. 오직 ‘평범’을 위해 애쓰고 있는 아이가 그림으로 전하는 말을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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