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01 17:26
수정 : 2019.11.02 02:31
전범선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군대 내 채식주의자의 권리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내년 초 입대를 앞둔 정태현씨는 “군대에서도 채식 식단을 보장해야 한다”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기 위해 준비 중이다. 나는 동물해방운동의 동지로서 그를 2년 전부터 알았다. 정씨는 내게도 전화를 걸어 군대 경험담을 물었다.
논산훈련소가 떠올랐다. 내게 채식이란 동물학살에 대한 보이콧이었는데 나의 소비와 상관없이 배급량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에 무기력했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너무 배가 고파 제육볶음을 먹었다. 오년 만이었다. 속이 매스꺼웠다. 그날 밤 나는 구토를 하며 의무실을 찾았다. 체질이 바뀐 것이다. 나는 22살에 <동물해방>을 읽기 전까지 고기를 즐겨 먹던 사람이었다. 채식을 한 이후로는 (고기를) 먹으려 해도 못 먹었다. 그 후 나는 음식을 거래했다. 전우들은 나를 “고기 주는 형”으로 기억했다. 사실상 밥만 엄청 먹었다.
정태현씨는 양심의 자유와 건강권을 위해 군대 내 채식 권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군 결정권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 문화에서 육식과 남자다움의 연결 고리를 먼저 끊어내야 한다. 김밥천국 이모들도 “남자가 풀만 먹고 어떻게 힘을 써!” 하시는데, 대한민국의 수많은 중대장들과 주임원사들을 어찌 설득할 것인가?
나만 해도 군대에서는 채식이 힘들다고 타협했다. 비건 식단을 포기하고 유제품과 달걀을 먹는 베지테리언으로 살았다. 나는 카투사였다. 미군 부대는 자율배식이고 샐러드 바도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비건으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자위했다. “사람 죽이는 연습 하러 와서 비건이 무슨 소용인가.”
그러던 어느 날 장군님이 오셨다. 한-미 연합훈련 ‘을지 프리덤 가디언’ 시찰차 주한미군 총사령관 브룩스 장군이 부대를 방문하신 것이다. 이 양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전쟁 발발 시 문재인 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최초의 흑인 주한미군사령관이기도 했다.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위용 있었다. 별이 4개나 달려서 그랬나. 아무튼 대한민국 육군 병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우두머리 수컷(알파 메일)이었다.
“장군님도 채식주의자셔.” 여단장님이 귀띔해줬다.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비건이십니까?” “응, 요즘 장군님들 다 건강 때문에 비건 하시더라고. 반달 장군님도 비건이셔.” 사단장님도 비건이었다니.
핑계가 없었다. 장군님들도 비건인데 내가 베지테리언일 수 없었다. 군인의 목적은 살생이 아니라 생명 보호였다. 채식의 정신과 같았다. 다음날부터 나는 비건으로 살았다. 몇달 뒤 해방촌 비건 식당에서 브룩스 장군을 마주쳤을 때는 뜨거운 전우애마저 느꼈다.
서양에서는 이미 채식과 남자다움의 관계가 재정립되고 있다. <터미네이터>의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비건 식단이 운동선수에게 주는 이점을 정리한 다큐멘터리 <게임 체인저스>를 제작했다. 브래드 핏과 <조커>의 호아킨 피닉스, <스파이더맨>의 토비 매과이어 모두 비건이다. 폴 매카트니는 “비거니즘이 새로운 로큰롤”이라고 정의했다.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앤서니 키디스 역시 비건이다. 채식이 정력에 좋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다.
대한민국에도 채식주의자 장군, 비건 ‘알파 메일’들이 등장할 때가 됐다.(올해 임명된 이스라엘 방위군 참모총장 코하비 장군도 비건이다.) “남자다움” 자체를 해체하는 게 옳지만, 남자만 군대를 가야 하는 한국 현실에서는 당장 피하기 힘든 개념이다. 과연 개를 “개 패듯이” 패서 잡아먹는 게 남자다운가, 아니면 고릴라처럼 풀만 먹는 게 남자다운가. 막강한 힘을 갖는 것보다 그 힘으로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채식주의자 장군님이 멋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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