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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29 18:06 수정 : 2019.11.30 13:56

전범선 ㅣ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민족사관고등학교(민사고)가 없어진다고 한다. 학교가 난리다. 후배들은 나의 의견을 묻는 인터뷰를 교지에 실었다. 질문이 영어로 왔다. 답도 영어로 했다. 민사고의 모순을 새삼 느꼈다. 영어 상용의 목적. “영어는 앞서간 선진 문명 문화를 한국화하여 받아들여 한국을 최선진국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는 결코 학문의 목적이 아니다.” 매주 월요일 애국조회 때마다 암송했다. 한국어를 쓰다 걸리면 학생 법정에 가서 처벌을 받았다. 한복을 입고 한옥에 살면서 영어만 써야 했다.

민사고는 특정 역사관을 표방하는 유일한 학교다. 민족주의 역사관을 가르치겠다는 뜻이다. 과연 그것에 충실한가?

나는 민사고에서 손꼽는 역사 ‘덕후’였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모든 역사 수업을 들었고, 학사, 석사 모두 역사로 했다. 단언컨대 민사고는 민족사관을 가르치지 않는다. 신채호, 박은식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민족주의 감정을 주입하기는 하지만, 민족사관이 무엇이고 다른 역사관과 어떻게 다른지 전혀 논하지 않았다. 한국사보다 미국사 수업이 많았다. 미국 수능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민사고는 역사관보다는 지도자 양성에 초점을 맞춘 학교다. 영어 이름이 ‘코리안 민족 리더십 아카데미’다. 대학이 서열화된 상태에서 지도자를 배출하려면 졸업생을 상위 대학에 진학시키는 것이 필수다. 실제로 민사고의 진학 성적은 매우 우수하다. 졸업생들이 각계각층의 지도자로 활약할지는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만, 교육 실적만으로 민사고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럼에도 교육부가 민사고를 일반고로 전환하겠다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1) 교육 다양화의 본래 취지를 벗어났다. 과고는 이공계열 진학률이 97%지만 외고, 국제고는 어문계열 진학률이 각각 40%, 19%다. 그래서 과고는 살리고 나머지는 죽인다. 민사고의 취지가 이름대로 민족사관 교육이라면, 사학과 진학률은 민망한 수준이다. 그러나 민족정신으로 무장한 세계적 지도자, 노벨상 수상자를 키우는 게 목적이라면, 개교 23년 만에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고 속단하는 것은 무리다.

2) 교육 서열화를 통한 특권계급의 세습을 부추긴다. 이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민사고는 애초 영국의 이튼이나 미국의 필립스 앤도버처럼 엘리트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사립 기숙학교다. ‘귀족학교’라는 비난 자체가 무의미하다. 학비가 연 2500만원이 넘는다. 나는 강원도 춘천 출신이지만 민사고 입시 때문에 대치동 유학을 가야 했다.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12기 국제반 중 강원도민은 나 혼자였다. 강원도 횡성에 있는 학교인데 말이다. 대부분 변호사, 의사, 교수, 대기업 임원 자녀들이었다.

결국 이데올로기의 문제다. 자유냐 평등이냐. 문재인 정부는 후자를 택했다. 하향 평준화가 아니고, 모든 학교에서 민사고처럼 자율적이고 다양한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내가 누렸던 혜택을 전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이 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군다나 비싼 학비도, 대치동 유학도 필요 없다면.

솔직히 2025년까지 그것이 현실화되리라는 약속을 믿기 쉽지 않다. 이른바 ‘조국 사태’ 때문에 너무 성급히 추진하는 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일단 개혁 의지를 지지하고, 성과를 기대한다. 5년 동안 공교육 정상화를 상당 부분 달성해야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 시원치 않다 싶으면 다음 정권이 시행령으로 민사고를 되살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모교가 없어지는 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민사고에 대한 좋은 추억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껴왔다.

민사고는 없어지는 게 맞다. 오래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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